Friday, February 28, 2014

성지(聖地)순례를 시작합니다..

깨달음이라고 하는 궁극적인 견지에서 보면..
어떤 것도 원시의 청정한 바탕에서 벗어나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에...
어느곳이 성지다... 어는 곳은 성지아니다 할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의 차원으로 내려오면...성지라는 것이 따로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정신적으로 찾아가는 우리의 길을 돕습니다..


성지(聖地)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모든 사물의 청정한 바탕..그것이 가장 근본적인 하나요..
온갖 경이로움으로 장엄하고 있는 보신의 정토..그것이  다른 하나요...
겉으로 나타난 모습을 지닌 정토..그것이  나머지 하나입니다...
우리는 보통.. 이 세번째 것을 가지고 성지라고 부릅니다...

성지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성취자들이 깨달음의 씨앗을 던져놓은 구멍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고요한 마음으로.. 사물의 배후에 있는 청정한 바탕을 보게되면..
세상 어떤 곳에서는..
사물의 청정한 바탕이 분출하듯이 에너지가 되어...
따뜻하게 감싸고 있는 곳을 볼 수가 있습니다...
깨달은 성자들은... 그런 곳을 일일히 지적해놓고 있습니다..
게다가...세세하게 등급까지 매겨놓았지요..
깨달음의 생산이란 측면에서...중요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가장 먼저.. 8대 화장터.. 24 근본성지를 이야기합니다...
세상에서... 깨달음의 성취가 가장 뛰어난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그곳은 사람의 마음을 릭빠로 바꾸어주는 시장과 같은 곳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까일라시나 랍치는 깨달음의 아주 큰 시장인 셈입니다..
한편.. 이 장소들은 가장 은밀하게 숨겨져 있습니다...
공공연하면.. 완전 시장통이 되어있을테니까요...
그치만 우리는 천장지비(天藏地秘)의 그 성지들을 알수 있습니다...
조용히 나눠주는 쪽지같은 정보가 있으니까요...

이 근본성지에서..다른 성지들이 가지처럼 뻗어나갑니다...
궁극적 깨달음의 다섯가지 특성을 의미하는 다섯 장소가 있습니다....
다섯개의 계곡이 있고... 세 개의 지방이 있고...네 개의 설역이 있고..
스물 한개의 은둔지가 있고....스물 한개의 설산이 있고...
1백 여덟개의 주성지가 있고..1천개의 보조성지가 있습니다...
크고 작은 이 성지들은.. 마치 한 개체의 커다란 나무 숲과 같습니다...
어떤 나무들이 일대에 커다란 군락을 이루면... 거기에는 모주가 되는 나무가 있습니다..
처음 생긴 나무이고...거기에서 다른 나무들이 파생되어나간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독립적인듯이 보이지만...뿌리로는 서로 연결이 되어있습니다...


용어정리합니다...
순례란 무엇일까요..?
순례란..성지로 가는 외적 행위가 촉발하는 마음의 변형 과정입니다..
마음의 변형이 없으면 순례가 아닙니다...
마음의 변형이란.. 마음이 허물어지는 과정과 유사합니다...
마음이 허물어진다는 것은 거기에 릭빠가 대신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아닌 다른 놈이 자리를 차지하는거죠..
그 놈은... 경계가 없고.. 모든것에 동시에 미쳐있고.. 모습이 없는 청정한 하늘입니다..
그 하늘이 나를 빼앗아가버립니다.. ㅜ ㅡ
바로 이것이 순례입니다...
그래서 순례는 강렬한 수행입니다...
세상에 있는 어떤 방법보다도 강력한 수행입니다...
사포도 거친사포가 있고 고운 사포가 있습니다...
3년무문관 같은 것은 고운 사포와 같고... 성지순례는 거친사포와 같습니다...
효과가 아주 아주 두드러지죠...
그래서..세상에 존재한 으뜸가는 대성취자는 거의 모두 성지를 순례했습니다..
어떻게 아냐고요..?
그건 저의 자료분석 능력을 믿으시면 됩니다..

성지라는 한개의 촛점...
그 곳으로 나아가며...마음이 오로지 한곳을 향할 때...
순례자는 자신의 본성.. 사물의 본성이라는 텅빈 하늘에 가까이 다가갑니다...
그것은 어머니와 같아서... 다가가면 그대로 받아줍니다...
순례의 목적은 순례하는 대상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 곳으로 향해 나아가고.. 그것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공덕과 지혜의 두 자량을 쌓는 겁나 강력한 수단입니다...

나꼬ㄹ...이 말은 순례를 의미하는 티벳말입니다... 
`나`는 성지라는 뜻이고...
`꼬ㄹ`는..순례라는 뜻입니다...
순례가 뭐냐고요..?
그것은 대상을 도는 것입니다...지극한 공경의 마음으로 그 것을 도는 것입니다...
예로부터... 공경한다는 것은 그 대상을 세바퀴 도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부처님이나 스승이 나타나면.. 우리는 공경의 의미로 그분을 세바퀴 돕니다..
그러나 예법에 의하면...왼쪽으로 도는 것은 아니고...오른쪽으로 도는 것입니다..
항상.. 대상이 오른쪽 어깨쪽에 있어야 하는겁니다...
왼쪽으로 돌면..그건 무뢰한입니다...
꼬라를 도는 것...절을 하는것...기도와 명상을 하는 것...공양을 올리는 것...
이 모든 것은 순례라는 말이 의미하는 좀 더 자세한 부분입니다...

도는 중심은 사실은 하늘입니다....
그러므로 꼬라를 돌 때..
우리는.. 나자신.. 모든 사물이 비어있는 청정한 하늘을 도는 것입니다...
절을 할 때... 나자신이 비어있는 청정한 하늘에 절을 하는 것입니다..
....
이 모두가 그와 같습니다..
알고보면 아무것도 외부에 있는 것은 없습니다...


Thursday, February 27, 2014

이 뭐꼬..?

보내오신 질문에 대한 저의 의견입니다..

질문은... 진언 `옴 와기스와리 뭄`에 관한 것입니다..
여러개의 진언이 같이 나열되어있는데..
그 중에서.. `옴 와기스와리 뭄`에 관한 부분만 뭐에 쓰는지 모르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정작 필요한 것은...
이 전부를 묶어서 어디에서 쓰려고 받은 진언인가..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안다면...얘기가 쉬워질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부분에 대해 밝혀주신 부분이 없으므로...
객관적인 상황에서만.. 몇가지 포인트를 짚어보렵니다..


우선.. 보여주신 진언들을 나열하겠습니다..
1, 옴 와기 스와리 뭄(옴 와기 스오리 뭄)
2, 옴 마니 빼메 훙
3, 옴 바즈라 빠니 훙(옴 벤자 빠니 훙)
4, 옴 아 라 빠 짜 나 디
5, 떼야타 옴 가떼 가떼 빠라상가떼 보디 쏘하
...........................................

이 진언들은 어떤 목적을 위해 하나로 묶었을겁니다...
대개...진언은 목적에 따라 여러개가 묶이게 됩니다...
여러가지 조합이 나올 수 있죠...

처음 세 진언은.. 금강승 삼존(三尊)에 대한 진언입니다...
가르침마다.. 다양한 삼존(三尊)이 나타납니다만...
금강승에서 삼존(三尊)은.. 문수(文殊)..관음(觀音)..금강수(金剛手)입니다...
이 경우..주존은 금강수(金剛手)가 되고.. 문수(文殊)..관음(觀音)은 좌우 협시가 됩니다..
문수(文殊)는 오른쪽이고.. 관음(觀音)은 왼쪽입니다...

여기에 나타난 순서대로...
옴 와기스와리 훙은 문수(文殊)의 진언이고..
옴 마니 빼메 훙은 관음(觀音)의 진언이고..
옴 바즈라빠니 훙은 주존인 금강수(金剛手)의 진언입니다...

그 다음으로..
옴 아 라 빠 짜 나 디..이것은 문수심주(文殊心呪)입니다...

마지막으로..
떼야타 옴 가떼 가떼 빠라상가떼 보디 쏘하.. 이것은 반야심주(般若心呪)입니다..
............................................


저는 이런 조합을 본 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래내용은 가능한 추론을 가지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마지막 두 진언의 공통분모는 반야(般若)입니다..
금강승의 어떤 전승에 속하신 분이라면..
먼저 앞의 세진언을 통해..삼존(三尊)의 가호를 구할 것이고..
그 다음에 어떤 것이 나온다면...구체적 목적으로 들어갈 겁니다...
여기서는...그 목적이 반야(般若)라는 겁니다...

문수(文殊)는 본디 16세 동자의 모습을 하고있고...
왼손에는 청색 연꽃을 들고있고.. 그 꽃 위에는 반야경(般若經)이 놓여있습니다...
반야경은 반야(般若)를 담고있는 그릇입니다..
오른 손에는 지혜의 불검을 들고 있습니다...
상징이 말해주듯이...그는  반야경(般若經)을 널리 선양하셨습니다..

티벳에서는 공부를 참 많이 합니다...
그래서 공부하는데 힘을 얻고자 하는 동기가 강해요..
그러다보니...티벳 스님이나 수행자들은..문수심주(文殊心呪)를 많이 외웁니다...
이 심주가,...기억력과 이해력을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셰드라(강원)에서 공부하시는 학승들은 중관과 미륵오론을 중심으로 공부하는데...
이 두 철학이 발생한 토대는 대부분 반야부 경전입니다...
그러므로.. 셰드라(강원)에서 공부하시는 학승들이라면...
먼저 삼존(三尊)의 가호를 구하고 난 뒤..
지적능력을 높이는 문수심주(文殊心呪)와.. 
공부의 목적인 반야심주(般若心呪)를 같이 묶어서 외울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니까.. 한가지 가능한 결론은...
셰드라(강원)의 학승들이 쓰는 가장 일상적인 진언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전승과 관련하여 얘기하자면...
반야부 경전을 직접 공부하고.. 중관의 논서.. 미륵오론까지 공부하는..
까담이나..겔룩의 학승들이 사용하기에 더 어울리는 진언이라는 겁니다...
..............................................



그런데 여기에서...
`옴 와기스와리 훙`도 문수진언이고...
`옴 아 라 빠 짜 나 디`도 문수진언인데.. 어떻게 다를까요?

문수(文殊)라고 줄여 말하는 `만주시리(文殊師利)`는 여러개의 다른 이름이 있습니다...
`만주고사`라 하기도 하고.. `와기스와라`라 하기도 합니다...
엄밀하게 얘기하면..`만주시리(文殊師利)`의 다른 몸들입니다..
`옴 와기스와리 훙`에서.. 와기스와리는 `와기스와라`를 가리키는 것이며..
단순히...삼존(三尊) 중 하나인 문수(文殊)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시면 되겠습니다..

반면... `옴 아 라 빠 짜 나 디`는 오선정불(五禪定佛)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반야(般若)지혜가 그 목적이라 보시면 됩니다....






위의 진언과 비교가 되는 진언을 하나 소개해드립니다...
위의 것이 공부하는데 필요한 진언일테지만..
아래 진언은 하는 일이 잘 풀리게 하는 진언이라 하겠습니다...

미빰린포체의  룽따(氣馬)를 무한히 늘리는 진언입니다..
룽따를 늘린다는 것은...마음의 활동은 줄어들고.. 릭빠의 자각이 늘어난다는 뜻입니다..
그 결과 사물의 근본바탕이 문을 열고 바깥세상으로 자신을 드러냅니다..
그것이 룽따(氣馬)의 자비로운 기운입니다...
오탁악세란... 룽따가 줄어드는 세상이라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오탁악세의 인간들은...잘 하고 싶지만..하는 일이 안되니 마음의 고통도 많습니다...
그런 세상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 이 진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
옴 와기 스와리 뭄
옴 마니 빼메 훙
옴 바즈라 빠니 훙
옴 아 훙
옴 아 훙 바즈라 구루 빼마 씻디 훙
옴 함 샤 마 ~ㄹ라 와 라 야
하 하 히 히 헤 헤 호 호 싸ㄹ와 비자야 씻디 훙
딱 쎙 큥 둑 디 야ㄹ 께

Wednesday, February 26, 2014

상사라에 남기는 증거물..


마루바닥을 찍은 사진이 하나있습니다..
세상에 있는 수많은 마루바닥 중 하나일 겁니다...
저는 마루를 좋아합니다만..
그것은 특별한 관리필요없이...앉거나 서거나 누울수 있고..
겨울에도 그럭저럭 버틸 수 있는 온도를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보존이 잘되고 보수성도 좋습니다...


그런데 이 마루바닥에 발자국이 찍힌 자욱 하나를 보고 ...마음이 집중이 됩니다..
사연을 알고보니...이것은 신통의 증거는 아닙니다...
어느 수행자가 여기에서..오직 여기에서...
50년간 절을 했다고 하더군요....
매번 절을 할때마다.. 정확한 자리에 발을 놓았나 봅니다.. 

그런데 한가지 저절로 알게되는 사실이 하나 있군요..
발자욱이 하나가 아니라 둘입니다...
해석하면 이렇군요..
우측에 있는 발자욱은 어른이 되기전에 만들어진 발자욱입니다...
좌측에 있는 큰 발자욱은 다 큰 어른이 된 뒤에 만들어진 발자욱이라는 거네요...
어른이 된 뒤에는 확실히 체중이 많이 실린 증거가 보이는 군요..

아이의 발과 어른의 발이 같지 않으니...
하다가하다가...발가락이 맞지 않아서... 좌측으로 발 놓는 자리를 바꾸었던 것입니다...

50년을 절을 했다더니...
어렸을때부터...늙은이가 될 때까지 한 모든 행동이..
고스란히 두 발자욱에 남아있군요...

요즘.. 신통같은 그런 주제를 다룹니다만..
이것이야 말로..상사라의 종이위에 찍을 수 있는
 최상의 신통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Tuesday, February 25, 2014

다르마의 꽃눈이 내리는 까톡 사원..

까톡 도ㄹ제 덴은...닝마의 6대 모사원( 母寺院)중의 하나이며...가장 오래되었다...
이 곳은 6대 모사원 중에서 유일하게 12세기 중반에 세워졌으며...
그 나머지는 모두 17세기에 세워졌다...
이 사원을 세우신 분은.. 까톡 담빠 데섹이라는 분이며...
빡두까귀의 창시자 팍모두빠님과는 형제지간이다..
까톡 사원은 티벳동부의 25대 성지 중 하나이다..
불사(佛事)의 으뜸성지이기도 하다...

이 사원은 불교에 대한 배움의 깊이로.. 인도의 나란다만큼이나 명성이 높았으며...
티벳역사에서 가장 걸출한 학승들을 배출하였다...
그 중에는... 까톡 릭진..쩨왕 노ㄹ부..규ㄹ메 쩨왕 촉둡 같은 분이 계셨고...
최근에는...까톡 씨뚜 최끼 갸쪼.. 켄뽀 ~ㅇ아왕 뺄상 같은 대학승이 계셨다...
게다가...무지개신(虹光身)이라고 하는거...그걸 성취한자가 10만명이나 나왔다고 한다..
족첸사원..세첸사원 뺄율사원 합치면..수십만명이 될 것이다...


사원이 있는 곳은...티벳동부 캄지방 남동쪽.. `데ㄹ게`이다...
이곳은 아우라가 아주 큰 사원들이 몰려있다...
족첸사원.. 세첸사원.. 종싸ㄹ 사원.. 뺄율사원..지금 말하고 있는 까톡사원...
그리고 잠괸 꽁뛸 로되타예님의 행적으로 말이 많았던 까귀의 뺄뿡사원까지...

지도에 말풍선이 여섯개 보일것이다..
확대를 해서.. 말풍선 찍어보면...어디가 어디인지 알 수 있다...
여기가 데ㄹ게라는 동네이고... 
닝마의 6대모사원 중에서..네개가 몰려있다...이 쬐그만 동네에 말이다...


View 동부 캄지방의 닝마사원 in a larger map



데ㄹ게는 말그대로 덕곡(德谷)이다... 
덕곡(德谷)이라는 이름이 말해주듯이...
그 곳은 네가지 복(福)과 열가지 덕(德)이 갖추어진 곳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넉넉하고 살기 좋다는 얘기다...
티벳은 너르고.. 사람도 많지만... 캄지방 사람들이 아주 정신적인 싹수가 있다고 한다..
티벳역사에서...다르마는 계속 동쪽으로 이동하였고...
캄지방에 있는 `데ㄹ게`는.. 닝마의 중심이었다...
지금은 중국 사천성 어디쯤이라고 얘기해야 할 것이다....

여기는 19세기에 티벳불교 르네상스를 일으킨 태풍의 눈이었다...
잠양켄쩨왕뽀님... 잠괸꽁뛸로되타예님...촉규ㄹ링빠님..빠뛸린포체님..미빰린포체님..
이런 분들이 겁나 무섭게 활동을 하셨다...
이곳은 딜고켄쩨 린포체님이 태어나신 곳이기도 하다...

구루린포체께서는... 이 역사적인 까톡사원에 대해 예언을하셨다...
동쪽으로 가서.. 캄지방.. 사자처럼 생긴 바위산 아래에...`까`라고 하는 사원이 생길 것이니..
이루 말할 수 없는 공덕을 가져다 주리라고 말이다...
담빠 데섹님의 스승은.. 까톡으로 가면... 
헤아릴수 없이 많은 사람들을 이롭게 하리라고 말하였다...
그 말에 따라 담빠 데섹은 그 지방을 뒤졌고... 
`율리`라고 하는 산 아래 비탈이 그곳이라는 알아차리게 되었다..
그는 거기서 사자같이 생긴 산을 발견하였을 뿐 아니라...
어느 바위 위에..`까`라는 글씨가 자연적으로 새겨져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근 거기에다 법당을 짓고... 까톡이라고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

빠드마삼바바는 이렇게도 예언하였다..
미래에... 나는 승려의 모습으로 나서.. 까톡을 세우리라...
밀법을 선양하고.. 가르침의 기치를 높이 세우고... 
쑤카바티 정토와 인연있는 자들을 이끌어주리라... 요렇게 말이다..

까톡사원은 112개의 말사를 거느리고 있다...
티벳에만 있는 게 아니다... 몽고에도 있고.. 내중국과 윈난.. 씨킴에도 있다...

까톡사원 소개시킬려고 사진 몇장 올렸는데... 이제보니 정말 심각하다...
거기가 추운곳인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눈이 오는 줄은 몰랐다..
아래 사진 봐봐라.. 정말 심각하지 않은가..!!
저 눈은 보통 눈이 아니다...
뭐드라...?  불광(佛光)인가 법륜(法輪)인가 하는 것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저 눈은 바깥에만 내리는 게 아니다..
지붕에 구멍이 난 것도 아닌데, 건물 안에서도 죽어라고 온다...
저런  눈을 꽃눈이라고 한다... 고귀한 다르마의 꽃눈(法花雪)...
내가 제일 좋아하는 눈이다...


보통 눈의 결정은 육각의 방사선상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다르마의 꽃눈을 줌인을 해서 들여다보니...
위 그림처럼 딱 요렇게 생겼다... 
그래서 다르마의 바퀴(法輪)라고 했는가 보다..

이 다르마의 꽃눈(法花雪)은 아무곳이나 내리지 않는다고 한다..
아라한이나.. 보살이나..비드야다라가 살았던 곳...수행했던 곳.. 
그리고...그런 분들이 열반했던 곳이라야 이런 눈이 내린다고 한다...
특히..열반했던 곳...그래서 무지개신을 확 펼쳤다가 사라진 곳...그런 곳이 많이 내린다..



무슨 얘기냐...?

누군가가 수행을 하고 모든 사물의 청정한 바탕을 각성하면... 
그 각성을 통해... 그 바탕의 힘이 외부세계로 분출을 한다...
그 기운은.. 대단히 강력한 파장으로 전세계를 일시에 관통한다고 한다...
모든 사물의 세포 하나하나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그런데... 그 파장이 일어나는 중심근처는 그 힘이 매우 강하게 자장을 형성한다고 한다...
그 힘은 매우 강력해서.. 근처에 있는 사물의 분자구조까지 바꾸어버린다...
그 일대의 대기는 그 기운으로 꽉채워진다...
본디... 같은 것이 같은 것을 잡아당기기 마련이다...
한 번 자장이 형성되면...같은 원인을 쌓은 사람을 그 장소로 잡아당긴다...
그 장소는 같은 손님이 계속해서 찾아오게 되어있는 것이다...
기운은 계속해서 쌓이고... 핵처럼 단단하게 뭉친다...
그 기운은...이 다르마의 꽃눈(法花雪)과 관련이 되어 있다...
다르마의 꽃눈(法花雪)은 꼭 이런 곳에만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성취자의 수행동굴.. 성취자가 나온 사원...
그리고 성취자들이 열반한곳... 성취자들을 화장하는 곳....
대개... 수행처와.. 열반처.. 화장하는 장소는 겹치기 마련이다...
동시에...수행처이자 열반처이고 화장터이다...
그래서 8대 화장터가 그리 유명한 것이다...


한 가지 더 말할 것이 있어..보충하고 나간다...
티벳사람들은 우리 눈으로 보면 조금 이상한 사람들이다...
뭔가 좀.. 유치한거 같기도 하다...
스승이나 큰 수행자가 남긴 유품이 있으면...거의 먼지까지 거둬가지고 보물처럼 간직한다..
스승이 남긴 사리나 머리카락...스승이 입으셨던 옷.. 스승이 남긴 염주나 금강저같은 법구...
스승이 남긴 토굴이나 동굴같은 장소...스승의 손길이 닿았던 곳...
뭐 가능하면 손자국이나 발자국 같은 것을 남겼다든가...뭐 그런 걸 말이다..
심지어는 유해로 남은 뼈..피..같은 것도 환을 지어서 간직하기도 하고 먹기도한다..
하나 더 있다... 스승의 육신을 다비했던 장소....이 곳은 특히 더 남긴 것이 많다...
재 같은 것으로 땅에 남겨지기 때문이다..
스승의 몸이나..그가 사용했던 물건.. 머물렀던 장소..다비한 곳은 그의 향훈이 남는다...
생선을 싸면 생선냄새가 나고.. 향을 싸면 향냄새가 나듯이 말이다..
그 향훈이란... 수행자의 각성이라는 행위를 매개로 하여...
모든 사물의 바탕기운이 외부세계로 누출되어 쌓여있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남아있는 사람들은.. 대스승의 유품을 가까이 하려고 애를 쓰는 것이다..

이 것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것이 성지(聖地)의 메카니즘이다...
그 릭빠의 청정한 기운이 더욱 강력하면... 대성지(大聖地)라 한다...
아주 아주 강력하면 초대성지(超大聖地)라 한다...
그래서 성지는 중요하다... 깨달음을 꿈꾸는 수행자에게...
그래서 성지를 순례하는 거고.. 성지에서 수행을 하는 거다...
두 가지는 결합되어있다..  순례..수행...
잠시 스쳐지나가는 것도 의미는 있다..
그러나..순례를 하되..한곳에서 몇년씩 수행을 하면서 옮겨가는 것이다..
대성취자는 거의 예외없이... 이 특별한 방법을 활용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건물 안에도  내린다니까 심각한데... 내려도 너무 내리는 거 같다...
저게 12세기 중반부터 저렇게 내렸으면... 어지간히 쌓였을 것이다..
눈덩이를 뭉쳐도 될 거 같다..
이런 곳은 결정적인 흠이 하나있다...
사진 찍으면.. 눈에 가려가지고.. 인물이 안산다는 것이다...
사진 왜 찍는지 모르겠다... 자기 모습이 보이지도 않는데...



잠시 다른 곳을 하나 보기로 한다...
다른 의도는 없다...
다만.. 다르마의 꽃눈은 결코 아무곳에서나 내리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다...
그것은 장담할 수 있다...
설령 한 두송이 보인다하더라도...
그런 정도로는..의미를 둘만한 장소가 될수는 없다... 
성지(聖地)의 가치비중은... 
우주 만물의 청정한 바탕에서 하강하는 릭빠의 기운.. 
법화설(法花雪)이 내리는 량과 비례한다고 볼 수 있다...
........


여기는 보드가야..
석가모니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으신 보리수나무 아래 금강좌가 있는 곳...
사진이 워낙 작아서 흐려지기 했지만.. 여기도 법화설(法花雪)이 엄청 내리고 있다...
마하보디 사원 꼬라를 도는 장면이다...
참고로 말하면... 보드가야에는 겨울에 눈이 오지 않는다...
한국인들에게는...반팔셔츠 입으면 맞는 날씨니까...



여기는 빠드마 삼바바의 성지..마라띠까 동굴이다..
역시... 법화설(法花雪)이 겁나 많이 내리고 있다...


그리고 여기는 네팔의 최고성지중 하나인 스와얌부나트이다..


Monday, February 24, 2014

바람의 말(氣馬)




티벳을 찾아 가면.. 룽따가 있다...
그들은...자신의 염원을 달아 공중에 펄럭이게 한다...
그래서 룽따는...티벳에서.. 가장 티벳다운 것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들의 삶이 얼마나 종교에 뿌리박고있는지를 보여주는 단면이다..
오늘은... 이 룽따의 의미를 찾아가 보자...

룽따는 네 가지 차원에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가장 외적인 차원에서..
룽따는.. 사람의 서원과 기도를 천상계로 나르는 동물이다...

내적인 차원에서..
룽따는 긍정적 에너지..행운과 연관되어있다..
룽따는 악마를 물리치고.. 깨달음을 준다..
맹호.. 설사자.. 금시조.. 용이 룽따를 중심으로  네 방위에 있다...
티벳 점성학에서.. 맹호, 설사자, 금시조, 용은 룽따의 네 가지 성질을 의미한다.



비밀한 차원에서...
룽따와 네 가지 동물은 지, 수, 화, 풍, 공을 말한다.
룽따는 모든 사물이 나타나는 기초공간...공(空)이다..
그런 측면에서...
룽따는 바람의 말((風馬)이 아니라...공간의 말(空馬)이다.
백호는 바람(風)을 의미하고.. 방위로는 남쪽이다..
설사자는 대지(地)를 의미하고.. 방위로는 동쪽이다..
금시조는 불(火)을 의미하고.. 방위로는 북쪽이다..
청용은 물(水)을 의미하며.. 방위로는 서쪽이다...

가장 비밀한 차원에서..
룽따는 마음이 올라타는 도구.. 미세한 기운(風氣)을 말한다...
그런 측면에서..룽따는 기운의 말(氣馬)이다..
미세한 기운(風氣)은 신체에서 다섯가지로 나타난다...
지수화풍공.. 다섯가지 동물이 내적으로 상징하는 부분이다..

모든 경험은 까르마의 결과이며.. 그 까르마의 실을 짜는 것은 마음이다.
나의 주위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일들은.. 마음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우리는 마음을 통제할 힘이 없다.
우리는 뭔가 착한 행동을 하려고 하지만..마음은 뒤따르지 않는다.


마음을 조정하는 것은..룽(風氣)...기운이다.
룽((風氣)은 마음이 올라타는 등이다...
룽(風氣)은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생각에 회초리를 친다... 이랴~~~!!
일어나는 생각의 본질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그것은 삼사라의 원인이 된다..
알아차리면... 생각의 본질은 시원의 청정한 바탕 속으로 녹아든다...
생각이 한번 고정된 틀에서 벗어나면... 그것은 말머리를 돌려..해탈을 향해 달린다...
그러므로...생각은 무명의 속박이 될 수도 있고...정광명의 해탈이 될수도 있다.
그 방향을 결정하는 것...말머리를 돌리는 것이 룽따이다.

룽따(氣馬)--바람의 말은 일상적인 마음에서 움직인다...
룽따(氣馬)가 약하면 모든 것이 문제가 되고..
세속의 일이든 다르마의 수행하는 일이든.. 그 능력이 감소될 것이다.
룽따가 약하다는 것은.. 기분이 처지고.. 병에 걸리기 쉽다는 뜻이다.
불행하다고 느끼고.. 모든게 불확실하게 여겨지고.. 의기소침해진다.
룽따가 강하게 잘 달리면.. 매사에 긍정적이게 되고...
탐욕..분노.. 무지.. 질투.. 오만이 줄어들고.. 릭빠의 지혜가 드러난다.



부지런히 수행해야겠다 마음먹지만..귀찮은 생각이 잡아당기고..작심 3일이 된다..
룽따가 약하면.. 나약한 풀잎처럼 이리저리 흔들리기 때문이다.
다르마를 수행하겠다! 무문관을 하겠다! 자비와 공성을 명상하겠다! 라고 생각하지만,
룽따가 견실하지 못하면.. 의도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쪽으로 가버린다.
애초부터 지옥과 아귀와 인간은 룽따가 손상되어있다.
더군다나 오탁악세에는 룽따가 감소되기 마련이다..
마음은 장애가 늘어나고.. 릭빠는 표면에서 사라지고 있다...

스승에게 기도하고..그분의 가피를 구하고..공양을 올리기 위해..룽따를 증가시키려 한다면..
먼저.. 고요하고 명징한 마음을 일깨워야 한다...
이와같이 명징한 마음이 이루어지면...저절로 릭빠에 다가서게 된다.
마음속에서.. 모든 사물의 청정한 바탕을 보게 된다...
아주아주 짧은 순간에 지나지 않더라도....
그 때... 룽따는 마음을 통해 좀 더 잘 흐르게 되는데...
이 룽따는...사실상.. 릭빠의 나타남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자신의 삶이 원만해지는 유일한 방법은..
마음이 줄어들고...그 틈을 릭빠가 채우기 시작하는 것이다..




내 안에 있는 네번째 우주


네 번째 우주는  비드야다라(持明)가 바라보는 우주이다..
이것은 부처님의 세 가지 법륜(法輪)을 포괄하는 우주이자..
세 가지 법륜 어디에도 속해있지 않는 족첸의 우주이다.

이 네 번째 우주의 입장에서 보면...
사물의 근본바탕이 다음 여섯가지 특성을 지지고 있다는 말은 거짓이다.

첫 째, 사물의 근본바탕이 본래부터 존재한다는 말은 거짓이다...
추함이나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나타난 사물의 바탕 속에 본래부터 존재하는 것이라면..
나타난 사물의 현상이 본래 청정하다는 말은 거짓되기 때문이다.

둘 째, 사물의 근본바탕이 결정되어 있는게 아니라는 말은 거짓이다.
사물의 근본바탕 결정되어 있지 않은 어떤 것이라면..
어떤 경로를 거치더라도..
속박에서 벗어난 뒤에도..무(無明)의 장애를 다시 경험할 수 있다는.. 
비논리적인 결론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셋 째,사물의 근본바탕이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말은 거짓이다.
결정되어 있는 것이라면, 사물의 본성은 변할 수 있다는 것이고..
무명의 장애는 끝까지 제거할 수 없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넷 째,사물의 근본바탕이 다른 것으로 변할 수 있다는 말은 거짓이다.
변할 수 있다면.. 그 바탕은 영원한 것이 아니고..
해탈의 결과는 다시 윤회의 원인으로 바뀔 수 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다섯 째,사물의 근본바탕이 어떤 무엇으로 정의내려질 수 있다는 말은 거짓이다.
나타난 현상이 수없이 많은 것이라면.. 바탕 또한 수없이 많아질 것이고,
사물의 바탕을.. 수없이 한정된 어떤 것으로 보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여섯 째, 사물의 근본바탕이 수없이 많다는 말은 거짓이다.
수없이 많은 바탕은 위없는 깨달음의 바탕이 될 수 없다.
무수히 대비되는 바탕은.. 청정한 바탕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일체 사물의 근본 바탕이 본래 청정하다고 보는 것은
이러한 잘못된 사고에서 벗어나있는 족첸의 수행자의 눈높이이다.
사물의 근본 바탕은.. 말이나 개념.. 설정 따위를 넘어서 있고.. 
존재한다..혹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한계를 완전히 넘어서 있다..
그게 사실이라면.. 중생이 상사라(輪廻)에 속박되어 있다는 말은 틀린 게 아닌가?
사물의 근본 바탕은 어디에도 예속되어 있지 않고, 어떤 장애를 가지고 있지도 않으니,
묶여있다거나 벗어나 있다는 말로 규정할 수 없다.
그러나 모습을 지닌 모든 것(衆生)은 윤회의 사슬에 묶여 있다.
묶여 있거나  벗어나 있는 것이 꿈 속에 보이는 것처럼..
묶여 있거나 벗어난다는 것은.. 사물의 근본 바탕이 지어내는 물 그림자 같을 뿐이다.
그 것을 경험하지만..사물이 가진 모습은 있는 것이 아니고, 있었던 적도 없다.
사물이.. 본래 근본바탕으로서 존재하는것이라면.. 목표인 깨달음은 내재하는 것이다...
어떤 무엇이 되려는 노력과 상관없이... 애초부터 해탈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사물은.. 본래부터 근본 바탕이어서...
깨달음이나 지혜라는 것은.. 애초부터  그 바탕 속에 갖추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사물의 근본 바탕을 들여다 본다면...
마치 꿈이라는 착각에서 깨어나는 것처럼..한 순간에 그릇된 믿음에서 벗어난다.
그러나..이 사물의 근본바탕을 어떤 모양으로 규정할 때에는.. 
속박되어 있거나.. 해탈되어 있다는 두가지 측면이 나타난다.


사물의 근본 바탕(Rigpa)은.. 부처의 바탕이자 중생의 바탕이다..
`릭빠`는 비롯됨이 없는 청정한 공성에서 벗어나 있지 않고,
그 본질(本質)은 원시의 청정한 바탕이며..
그 성품(性稟)은  명징하게 알차리는 자각이다.
그 본질은 존재한다.. 존재하지 않는다는 어떤 한계에 묶이지 않으며,
그 성품(性稟)은 나타나 어떤 모양을 지을 잠재성이다..
그리고 이 둘의 무분별이 대원만(족첸)이며.. 네 가지 극단에서 벗어나 있다..
둘이 아니라 셋으로 본다면, 본질(本質), 성품(性稟), 기운(運)이 된다.

깨달음이란 사물의 청정한 바탕(릭빠)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 것은 과정에서 세 가지 깨달음으로 나타난다.
그 성품(性稟)은 명징한 자각으로 비추고.. 다섯 가지 빛을 드러낸다.
그 중에서 세 가지 눈부신 빛은...모든 것을 포용하는 정광명(淨光明)이다.
그러나 그 것은 분리된 사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 기운(運)은 원시의 청정한 공성을 보는 명징한 자각으로 나타난다.
그 자각의 성품은 어떤 것에도 걸림이 없이 명징하게 비추고..한계가 없다.
이 원시의 청정한 바탕은 내재되어 있지만.. 겉으로 나타나거나 파악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 본질(本質)과 성품(性稟)은 구경의 깨달음의 순간에 드러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바깥으로 드러난다는 것이 아니다... 자기내포되어있기 때문이다.
이 원시의 청정한 바탕없이는 성취도 없고.. 깨달음도 없다.
붓다의 두가지 자량도 쌓이지 않을 것이다...

릭빠의 자각이 모든 사물의 청정한 바탕에 머무를 때는
그 자각이 시작되고 끝나는 지점에서.. 
자각이나 빛의 모습으로 나타나 있지 않은.. 내적 명징성으로만 존재한다.
그러나 릭빠의 자각이 원시의 청정한 바탕에서 벗어날 때는.. 
그것은 눈부시게 빛나는 정광명(淨光明)으로 나타난다.
어떤 한 중심에 머무는 릭빠의 자각은.. 일시적인 바탕에 머무는 릭빠의 자각이다.
이 경우.. 릭빠의 자각은 다르마다투(法系)에서 벗어나고...
삶의 모습을 띠고 있기에.. 나타난 그 모습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 것은 청정한 바탕이 아니라..그 바탕의 나타남으로 보아야 한다..


청정한 법계(法系)의 근본 바탕은 생기 넘치는 화병(花甁)의 신체이다..
어떤 것도 일어나지 않는 청정한 바탕에서 벗어날 때.. 명징한 자각의 기운이 움직인다.
명징한 자각의 기운이 움직일 때.. 사물의 바탕에서 릭빠의 자각이 일어나게 된다.
이 릭빠(Rigpa)의 자각은..
근본의 자각(涅槃)과 사물의 모습(輪廻)이 동시 현존하는 세계의 여덟 문으로 나타난다.
그 순간 청정 법계(法系)가 비어있는 하늘처럼 높은 곳에 나타난다...
그 공간 전체에 편재해있는 정광명(淨光明)의 지복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릭빠의 자각에서 일어나는 근본바탕의 거대한 모습이 아래쪽으로 나타나고..
그 주위에.. 일체를 한 모습으로 인식하는 세계가 모든 방위에 나타난다..
그 보다 더 아래쪽으로는.. 
여섯 가지 모습으로 자신을 인지하는 세계(六道輪廻)가.. 윤회의 문을 통해 나타난다...

포괄적이고 자기내포적인 근본바탕(릭빠)이..바깥으로 나타날 때..
본질(本質)에 있어서는 청정한 공성의 빛이지만..
성품(性稟)은 다섯 가지 명징한 자각의 확장이며..
기운(運)은 열린 하늘처럼 걸림이 없고..모든 곳에 동시에 미쳐있다..
이 기운(運)은 세가지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인지하는 지능...
안아서 기르는 자비..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널리 이롭게 하는 능력..

기운(運)은.. 명징한 자각이 외부세계로 드러나는 여덟개의 문이다...
자비(툭제)
광명(외)
신체(꾸)
지혜(예세)
불이(니메)
해탈(따돌)
회문(마닥빠코ㄹ외고)
혜문(닥빠예세끼고)

이 여덟 가지는 고귀한 소원성취의 보석이다...
근본바탕을 외부로 현현시키는 이 힘은...어떤 무엇이라도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자비로운 기운은.. 우주에 있는 모든 사물에 스며들어있다..
열반과 윤회는 무엇이 디었든.. 이 자비로운 기운이 나타남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우주를 다 뒤진다 해도..이 자비로운 기운에 기반하지 않고 나타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사물의 현상을 가늠하는 관념이 되었든..관념을 벗어난 각성이 되었든...
모두가 릭빠의 청정한 자각이 드러남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열반과 상사라에 있는 일체 사물의 모습은...
릭빠의 창조적인 힘이 마음을 통해 나타나는 현상일 뿐이다..
이 창조적인 힘은...마릭빠(無明)의 속박과 릭빠(常明)의 해탈을 드러내더라도.. 
드러나는 그 두가지 모습으로부터 본래 자유롭다..


사물의 근본바탕(릭빠)을 자각하는 것은  해탈의 토대이다.
이 근본 바탕이 자각될 때 나타난 모든 사물의 모습은 해탈의 도구로 변한다..
근본 바탕이 자각되지 않을 때 나타난 모든 사물의 모습은 속박의 도구로 변한다.
근본 바탕이 드러나는 순간.. 그 것을 자각하는 사람은..
그 것을 다른 어떤 사물이 아닌,자기 본성의 내적 광명으로 인식하게 된다.
그 순간.. 사물을 어떤 무엇으로 바라보려는 모든 노력이 사라지고..
자기내포되어있는 그 자각이 이루어지는 순간.. 깨달음은 비추어 오게 된다.
그 깨달음은 마릭빠의 속박과 릭빠의 해탈.. 이 둘의 차이를 명확하게 알아차린다..
무명의 어두운 구름이 사라지고.. 원시의 청정한 바탕이 드러난다.
이 순간.. 근본 바탕은 그 자체를 전개하여...
분별없이 열반과 상사라가 동시현존하는  장엄한 드라마를 보여준다...
이 것을 두고..모든 사물 속에 감추어져 있는 청정한 바탕을 깨닫는다고  한다.
나라고 하는 사물의 모습이.. 원시의 청정한 바탕 속으로 녹아들어 갈 때..
궁극적인 깨달음이라는 열매가.. 
어떤 무엇으로 현현하기 이전인 그 자체의 청정한 바탕 속에서 저절로 일어난다.

롱첸빠(Longchenpa)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우주(宇宙)의 근본 원인은.. 일체의 자기내포적인 각성의 상태.. 릭빠이다.
이 릭빠는 나타난 사물의 바탕이며..
사물이란 릭빠에서 벗어나있는 것을 말한다.
이와같이 일체를 포괄하지만 자기내포적인 청정한 자각을..그 상태로 지키지 못했을 때...
명징한 자각이 일어나고..
그 자각이 전개됨에 따라.. 이 우주가 하나의 사물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사물의 근본 바탕이 청정한 공성이고.. 
나타난 사물 하나하나((衆生)가 있는그대로를 명징하게 비추고 있다면..
어떤 장애에도 걸림이 없어야 하고.. 어떤 한계로도 규정지을 수 없어야 한다.
모든 사물은.. 본래 붓다가 지니고 있는 본질과 성품과 기운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청정하게 비어있는 바탕에서.. 모든 사물을 있는그대로 명징하게 자각한다면..
모든 것은 이미 결함이 없고 완전하기 때문이다.
사물의 근본바탕은 속박되어있거나 해탈되어있지 않으나..
속박되거나 해탈되는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
그러므로..사물의 본래 깨달아 있는 바탕은..다시 깨달아가는 과정을 통해 드러나야 한다.
깨달음은 이렇게 이루어진다.

생각을.. 하나의 대상으로 삼아 관찰해 보면..
이 것은 비어있고 모든 사물을 동시에 비추는 릭빠(常明)의 자각에 지나지 않는다.
그 순간.. 하나의 생각을 구체적인 어떤 무엇으로 규정하지 않게 되고..
릭빠의 명징한 자각이.. 밖으로 모습을 갖추어 드러내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이렇게 포괄적이고 자기내포적인 자각이 일어날 때,
일어난 생각을 변형시키거나 없애려는 어떤 명상적인 기법을 사용하지 않아도..
생각이라는 거짓된 설정은.. 본래 없었던 것처럼.. 즉시 사라지게 된다.
그 순간 릭빠의 자각이 일어나고.. 붓다의 지혜가 드러난다.

이 길에서 중생이라는 조건과 보살이 나아가는 길과 부처가 도달하는 열매는.. 
서로 다른것이 아니라...포괄적인 하나로서 동시에 나타난다...
그러므로 다르마가 추구하는 사물의 청정한 바탕은...살아가는 다양한 모습 속에 들어있다.
그러므로 깨어서 바라보는 일상의 모든 행위는...부처를 깨닫는 방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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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가 다양하게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하나의 일시적인 사물로서 존재하는 우리 인간이..
저마다 다른방식으로 자기 삶을 바라보고.. 행동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은.. 자신이 선택한 다르마인 것이고..수행방편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