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October 5, 2011

세계인의 인터넷 접근권리를 찾아주는 FabFi 프로젝트

세계인의 인터넷 접근권리를 찾아주는 FabFi 프로젝트:

아프가니스탄의 도시인 Jalalabad 에는 놀랍게도 쓰레기통에서 찾아낸 부품들로 만들어진 초고속 인터넷 네트워크가 있다. 주로 미국에서 건너온 엔지니어들이 주축이 되어 FabFi라는 프로젝트로 구축한 네트워크이다. 이들은 마을 주변에서 보드와 철사, 플라스틱 튜브, 캔 등을 이용해서 약 $60 달러 정도에 FabFi 노드를 만들었다. 영화처럼 느껴지는 이 스토리는 향후 우리 세계의 통신 및 네트워크와 관련한 인프라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수도 있다.

FabFi는 MIT Fab Lab과 Center for Bits and Atoms에서 진행하는 오픈소스 프로젝트이다. 현재 아프가니스탄의 Jalalabad 와 케냐의 3군데 도시에서 진행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FabFi 네트워크는 병원 등과 같은 지역사회 필수 인프라에 해당하는 곳들과 지역의 사업을 하는 사람들에게 큰 도움을 주고 있다. 금속재질의 메시(mesh) 표면으로 집에서 만든 RF 반사체를 덮고, 라우터를 연결한 뒤 멀리 떨어진 라우터와 ad-hoc(중앙에 어떤 매개 네트워크가 없이 직접 연결) 방식으로 통신을 할 수 있도록 하는데, 반사체(reflector)의 수에는 이론적으로 제한이 없다. 현재 이렇게 구성된 FabFi 네트워크는 Jalalabad 전역을 커버하고 있다.

이 반사체의 전력은 자동차의 배터리를 가지고 공급할 수 있는데, 이를 통해 굳이 지역에 중앙집중식으로 전원이 공급되지 않더라도 통신망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한다. 이들 네트워크의 활용성을 높이기 위해 저렴한 노트북 보급 프로젝트인 OLPC(One Laptop Per Child)도 같이 보급되었는데, 이를 통해 지역주민들이 위키피디아 등에 접속을 하는 등 지역사회의 발전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FabFi 프로젝트가 아프가니스탄과 같은 낙후된 지역의 문제를 크게 해결해주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시도가 세계를 조금은 더 살기좋은 곳으로 만들어주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FabFi 와 같은 네트워크는 중앙집중적인 관리가 없더라도 지역사회에서 독자적으로 운영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지역사회에서 독자적으로 할 수 있는 자율적인 분산기술들이 저렴하게 많이 보급될 때, 우리 사회의 안전성도 훨씬 좋아지게 될 것이다.


FabFi 프로젝트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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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October 1, 2011

영화 '인사이드 잡'이 말하는 경제위기의 본질


유럽 재정위기가 촉발한 '더블 딥(이중 침체)' 공포가 세계 경제를 강타하고 있다. 그리스와 아일랜드, 포르투갈 등 남부 유럽의 재정위기가 유럽 전반의 위기로 확산되면서 독일과 프랑스 등 금융기관들의 자금경색이 시작되는 등 한때 세계 금융시장이 패닉으로 치닫기도 했다. 일시적인 유동성 압박을 넘어 글로벌 신용경색과 세계적인 경기침체 또는 경제공황으로 이어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까지 나오고 있다.

지난 5월 개봉한 영화 '인사이드 잡'은 경제위기가 계속해서 확대 재생산 되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올해 아카데미 영화제 다큐멘터리 부문 작품상을 받은 이 영화의 문제 제기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정치 권력과 월스트리트 금융 자본의 결탁, 둘째, 무분별한 규제완화의 위험과 금융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이다. 이 영화는 우리가 지난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에서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했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2011년 10월 세계 경제의 위기는 3년 전 2008년 서브프라임 사태의 연장선 위에 있다. 책임자들은 처벌을 받기는커녕 여전히 회전문을 들락거리면서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 파생상품 규제는 흐지부지됐고 미국의 부실을 세계 여러 나라들에 떠넘기는 과정에서 글로벌 불균형이 더욱 심화됐다.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교수가 지적한 것처럼 이익을 사유화하고 손실을 세계화하는 시스템이 지속되면서 위기를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

미국 금융산업은 1980년 도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 시절부터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1999년 은행의 인수‧합병을 제한하고 고객의 자산으로 모험 투자를 할 수 없도록 규제한 글래스스티걸법이 폐지되고 시티그룹 살리기 법이라고 불렸던 글렘리치블라일법이 통과되면서 금융회사들의 인수합병이 크게 늘어났다. 이 법의 통과에 주도적으로 개입했던 사람이 앨런 그린스펀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이었다.

그린스펀과 함께 글렘리치블라일법을 통과시키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로버트 루빈 재무부 장관은 시티그룹 부회장으로 옮겨간다. 루빈은 재무부 장관으로 옮겨오기 전에 골드만삭스의 최고경영자를 지낸 바 있다.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 시절 재무부 장관을 지냈던 도널드 리건 역시 메릴린치 최고경영자 출신이다. 연준 의장이었던 폴 볼커는 체이스맨하탄 출신이다. 30년에 걸친 금융 규제완화는 이들의 작품이었다.

1998년 미국 상품선물위원회(CFTC)가 파생상품 규제 법안을 발표했을 때 월스트리트는 로비스트들을 동원해 법안 통과를 강력하게 저지하면서 오히려 파생상품을 보호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린스펀과 래리 서머스 재무부 장관, 필 그램 상원 금융위원장의 작품이었는데 그램은 퇴직 이후 UBS인베스트먼트뱅크의 부사장으로 옮겨갔고 서머스는 헤지펀드의 컨설턴트로 일하면서 2천만달러 이상을 벌어들였다.

소로스펀드의 조지 소로스는 금융 시스템을 거대한 유조선에 비유한다. "이것은 아주 크죠. 그래서 기름이 출렁거려서 배가 전복되는 걸 막기 위해 칸막이로 구분해 놓습니다. 1930년대 세계 대공황 이후 도입된 금융 규제는 이런 물샐 틈 없는 벽이었습니다. 1980년 이후 실시된 금융 규제완화는 이런 벽으로 만든 컴파트먼트를 없애는 것이었죠. 위기는 1990년 후반부터 시작됐습니다."

"규제완화와 기술의 발전은 파생상품의 폭발을 일으켰습니다. 경제학자들과 은행가들은 그들이 시장을 더욱 안전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했지만 그건 사실과 다릅니다. 냉전시대가 종식된 이래 전직 물리학자와 수학자들은 그들의 기술을 냉전시대의 기술이 아닌 금융시장에 적용했습니다. 투자은행과 헤지펀드를 합쳐서, 전혀 다른 종류의 무기, 워렌 버핏이 말했듯이 대량 살상무기를 만든 거죠." (앤드류 셩, 중국금융감독위원회)

"감독자들, 정치가들, 사업가들 모두 이런 금융적 혁신이 가져올 금융 시스템의 안정성에 대한 위협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파생상품을 이용해서 은행가들은 어떤 것에도 도박을 할 수 있게 됐습니다. 유가의 상승이나 하락에 돈을 걸 수도 있었고 어떤 회사의 파산이나 심지어 날씨에도 돈을 걸 수 있었습니다. 1990년 후반 즈음에는, 파생상품 시장은 15조달러 규모로 불어났습니다." (앤드류 로, MIT 금융공학실험실)

2000년 이후 파생상품 시장이 급격히 성장하면서 월스트리트는 골드만삭스와 모건스탠리, 리먼브라더스, 메릴린치, 베어스턴스 등 5개의 투자은행과 시티그룹과 제이피모건 등 2개의 금융 그룹, AIG와 MBIA, AMBAC 등 3개의 보험회사, 그리고 무디스와 스탠다드앤푸어스, 피치 등 3개의 신용평가회사들로 재편됐다. 먹이사슬의 증권화, 수십조달러가 연결된 이 새로운 시스템이 199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를 불러왔다.

"30년 전에는 만약 당신이 집을 사려고 대출을 받으면 빌려준 사람은 당신이 돈을 갚는 것을 기대했죠. 그러나 증권화가 확산되면서 돈을 빌려주는 사람은 상환이 안 되는 위험에 노출되지 않습니다. 새로운 시스템에서는, 대출업자가 모기지론을 투자은행에 팔고 투자은행은 수천개의 모기지와 다른 대출 즉, 자동차 론, 학자금 론, 신용카드 론등을 모두 합해서 복잡한 파생상품을 만듭니다. 부채담보부증권(CDO)이라 불리는 파생상품입니다."

"그리고 나서 투자은행들은 CDO를 투자자들에게 판매합니다. 이제, 주택소유자가 모기지를 갚으면 그 돈은 전세계에 걸쳐있는 투자자들에게 흘러들어갑니다. 투자은행들은 신용평가사들에게 CDO의 등급평가를 위해 돈을 지불하고 CDO중 많은 수량이 AAA등급을 부여 받습니다. 이렇게 되면 CDO가 높은 등급의 증권에만 투자할 수 있는 은퇴자금 펀드의 인기가 높아집니다. 이 시스템은 시한폭탄이었습니다."

"대출업자들은 돈을 빌린 사람들이 돈을 갚을지 못갚을지에 대해 더이상 신경을 쓰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더욱 위험한 대출을 시작했습니다. 투자은행들 또한 신경쓰지 않습니다. CDO를 많이 팔면 팔수록 그들의 수익은 더 높아져갔습니다. 그리고 투자은행들로 부터 댓가를 받은 신용평가사들은 그들이 평가한 CDO의 등급이 틀렸다고 하더라도 책임이 없었습니다. 위험한 상황에 처하지도 않게 된거죠. 그리고 감독(규제)통제도 없었죠."

질리언 테드 파이낸셜타임즈 미국 편집장은 "그러니 더욱 더 많은 대출을 퍼줘도 괜찮다는 사인을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2000년부터 2003년 사이에 모기지론 대출은 4배 가까이 늘어났다. 모기지론의 위험이나 안정성에는 관심이 없고 무작정 대출을 늘려서 수수료를 받아챙기는데만 관심이 있었다. 테드는 "이들이 자신들이 위험한 짓을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변했다.

루비니에 따르면 2006년 S&P 500 기업의 이익 가운데 40%를 금융기관들이 차지할 정도로 월스트리트의 이익은 가파르게 불어났지만 이는 사상 최대의 금융 거품 덕분이었다. 파이낸셜타임즈의 수석 이코노미스트 마틴 울프는 "그건 실제 이익이 아니라 시스템에 의해 창조된 돈이고 이익으로 계상된 것일 뿐"이었다고 설명했다. 울프는 "단순히 국가적인 수준을 넘어 세계적인 규모의 피라미드 사기였다"고 지적했다.

그 무렵 투자자산 대비 대출 비중을 나타내는 레버리지 비율은 33배까지 올라가기도 했다. 3%만 자산가치가 하락해도 파산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레버리지를 규제해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그린스펀은 이를 거부했다. 불안 심리가 높아지자 AIG 등은 신용부도스왑이라는 보험상품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CDO가 부도나면 손실을 보장해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이들 보험회사들은 아무런 충당금도 적립하지 않았다.

이 영화는 서브프라임 사태가 끔찍한 재앙이었다는 사실을 넘어 충분히 예견됐을 뿐만 아니라 의도된 재앙이었다는 사실을 폭로한다. 포춘 편집장인 알렌 슬론은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을 받은 사람들은 평균 집값의 99.3%까지 대출을 받았는데 이는 그 집에 돈이 없다는 걸 의미한다"면서 "이건 정말 미친 짓임에 틀림없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이런 황당무계한 금융상품의 3분의 2 이상이 AAA 등급을 받았다는 사실은 이제는 놀랍지도 않다.

골드만삭스는 이런 말도 안 되는 금융상품을 판매하면서 한편으로는 이 금융상품들이 부도날 위험에 대비해 보험상품에 가입하는 이율배반적인 투자를 하기도 했다. 골드만삭스가 AIG에서 구매한 신용부도스왑이 220억달러나 됐다. 그 금액이 너무 커서 AIG가 부도날 위험에 대비해 AIG의 신용부도스왑을 1억5천만달러어치 구매하기도 했다. 심지어 자신들에게 투자한 고객들이 돈을 잃으면 잃을수록 자신들의 이익이 늘어나는 CDO를 판매하기도 했다.

2008년 미국 상원 청문회에서는 "당신네 직원들이 쓰레기라고 말한 금융상품을 고객들에게 판매한 것이 옳은 일이냐, 심지어 당신들은 당신들이 판매한 금융상품의 반대편에 돈을 걸기도 했다"는 비판에 골드만삭스의 최고경영자 로이드 블랭크페인은 "시장 조성이라는 차원에서 그건 모순이라고 할 수 없다"면서 "우리의 경쟁자들은 우리보다 훨씬 더 심했다"고 답변했다.

실제로 모건스탠리는 AAA 등급의 금융상품을 판매하면서 정작 그 금융상품이 부도날 가능성에 베팅을 했다. 1년 뒤 모건스탠리는 수억달러를 벌었지만 투자자들은 원금을 모두 날렸다. 스탠다드앤푸어스나 무디스 같은 신용평가회사들이 공범이었다. 이들은 이 위험천만한 파생상품들에 최고 등급을 부여하고 엄청난 수수료를 챙겼다. 무디스의 이익은 2000년에서 2007년 사이 4배 이상 불어났다.

"시티뱅크의 척 프린스가, 이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음악이 끝날때까진 춤을 춰야만 합니다'. 그런데 사실, 그가 그 말을 할 때쯤엔, 이미 음악은 멈춰버린 후였죠." (조지 소로스) "행크 퍼슨 골드만삭스 최고경영자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 것을 아주 명확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해일이 다가오고 있는걸 보고 있으면서 당신은 그저 어떤 수영복을 입을건지에 대해 우리에게 제안하고 있습니까'라구요." (크리스틴 라가르드, 프랑스 재무부 장관)

실제로 2008년 봄부터 주택압류(담보권행사)가 늘어나면서 먹이사슬이 파괴되기 시작했다. 그해 여름 페니메이와 프레디맥 등 모기지론 회사들이 파산했고 그해 9월 리먼브러더스가 파산했다. 베어스턴스는 파산 한 달 전까지 AAA 등급을 받았다. 리먼브러더스와 AIG도 파산 며칠 전까지 AA 등급을 받았다. 리먼브러더스의 파산 직후 AIG가 판매한 130억달러의 신용부도스왑이 부도 위험에 놓이자 정부가 AIG를 접수, 1600억달러를 쏟아부었다.

"아주 무서웠습니다. 전체 시스템이 얼어 붙어버렸죠. 아무도 돈을 빌릴 수 없었죠. 그것은 마치 세계적인 금융시스템의 심장마비와 같은 거였습니다." (누리엘 루비니) "우린 아직도 어떤 식으로든 피난처를 만들수 있고, 그리고 폭풍(금융위기)에 피해가 덜 입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아주 세계화된 환경에서는 (각국의) 경제는 서로 연결돼 있으니까요."(리 씨엔 룽, 싱가폴 수상)

월스트리트가 고용한 로비스트가 3천명, 이들을 통해 정치권에 후원금으로 들어간 돈이 1998년부터 2008년까지 50억달러에 이른다. 수많은 경제학자들이 규제완화를 요구하면서 정부 정책에 영향을 미쳤지만 정작 금융위기를 경고한 경제학자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기업에서 엄청난 규모의 지원금을 받는다. 투자은행의 이사로 일하면서 정부 정책 자문을 하는 학자들도 많다.

오바마 정부에서도 상황은 크게 달라진 게 없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당선되기 전까지만 해도 월스트리트를 개혁하겠다고 큰 소리를 쳤지만 정작 금융 개혁안은 알맹이가 빠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심지어 티모시 가이트너 전 뉴욕연방준비은행 총재를 재무부 장관에 임명했다. 가이트너의 후임으로는 골드만삭스 출신의 윌리엄 더들리를 임명했고 조지 부시 대통령 시절 재무부장관이었던 래리 서머스를 경제자문으로 임명했다.

"왜 금융엔지니어(금융공학자)들이 진짜 엔지니어들보다 4배에서 100배나 많은 돈을 받아야 합니까. 진짜 엔지니어들은 다리를 만들죠. 금융엔지니어들은 꿈을 만듭니다. 그리고 그 꿈이 악몽으로 판명되는 순간 다른 사람들이 그 댓가를 치릅니다. 엄청난 댓가를 치룬 후, 우리는 재앙을 피했고 회복중입니다. 그러나 금융위기를 초래한 사람들과 기관들은 아직도 권력을 쥐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변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서브프라임 사태 이후 3년이 지났지만 위기의 불씨는 아직 제거되지 않은 상태다. 오히려 최근 유럽 재정위기 사태에서 다시 확인했듯이 무분별한 양적완화와 재정정책은 근본해법이 될 수는 없다. 오히려 2008년은 민간부문의 위기였지만 2011년은 정부부문의 위기다. 최악의 경우 유럽의 재정위기가 세계적인 실물경기 침체로 이어지고 통제 불가능한 금융위기로 발전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 전 세계은행 부총재는 지난해 출간된 '스티글리츠 보고서'에서 "세계화한 외부성(global externality)을 교정하고 글로벌 공공재(global public goods)를 공급하는 것이 위기의 해법"이라고 지적했다. 이마뉴엘 월러스틴 예일대 교수도 "달러화가 기축통화로서 역할을 상실하면서 미국의 엄청난 채무에 의존한 성장정책은 지속 불가능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영화 '인사이드잡'이 주는 교훈은 더 늦기 전에 금융규제를 다시 강화하고 자산거품을 꺼뜨려야 하며 실물경제를 활성화할 정책적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무엇보다도 정치권과 월스트리트 금융자본의 결탁을 청산하고 금융위기의 책임자들을 처벌해야 한다. 그리고 세계적으로 미국 의존도를 낮춰 단계적으로 글로벌 불균형을 해소하는 것이 근본 해법이 될 것이다.

지난 30년 동안 세계 경제를 지배해온 신자유주의 시스템의 한계가 드러난 이상 변화는 불가피하다. 감세와 규제완화 기조를 전면 수정하고 정부의 시장 개입과 통제를 강화해야 한다. 금융 시스템을 바로잡고 공공부문을 강화해 무너진 사회 안전망을 복원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자본주의의 탐욕을 제어할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위기는 계속 되풀이 될 수밖에 없다.

Friday, September 16, 2011

Khyentse - 켄쩨




닝마 전승의 역사에서..
켄쩨- Khyentse...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특별한 이들입니다..
이 이름이 특별해진 것은
이 이름을 특별하게 만든 사람이 이 세상에 왔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를 `직메 링빠(Jigme Lingpa)`라 부릅니다..
그는 `띠송데첸(Trisong Detsen)` 왕의 환생자이자.. 
비드야다라...`비말라미뜨라(Vimalamitra)`의 화신이었습니다..
이 두 인물은...닝틱의 역사에서..가장 주목해야할 인물입니다...
빠드마삼바바께서 ~ㅇ아얍링의 연화광정토로 떠나신 이후...
티벳역사의 깜깜한 밤하늘에서... 
계속해서 유난히도 빛나는 별들이 되어 닝틱의 역사에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직메 링빠는.. 
닝틱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켄쩨`라는 이름을 사용한 분입니다..
지혜와 자비의 빛을 의미하는  켄쩨 외쎄르(Khyentsé Özer).. 
이것이 그의 이름입니다...


구루 린포체는...
쌍게 링빠(Sangye Lingpa)의 보장.. `라마 공뒤의 비밀예언`을 통해..

 `직메링빠`라는 인물이 700년 후에 나타나리라 예언하였습니다..

 
"티벳 남부에서..  외쎄르(Özer)라는 이름을 가진 뛸꾸(환생자)가 나올 것이니.. 
그는 심오한 닝틱(Nyingtik)을 통해..중생들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리라.. 
그를 만나는자는 모두.. 비드야다라의  정토로 인도되리라.."


잠양 켄쩨 왕뽀(Jamyang Khyentse Wangpo)..
그는 켄쩨(Khyentse)라는 이름을 설원에 널리 빛냈습니다...
그는 매우 다양한 캐릭터를 드러냈습니다....
잠양 켄쩨 왕뽀는 무한한 특성을 지닌자로.. 보기드문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는 그저 한사람이었지만... 기억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이름으로 불렸고..
다양한 캐릭터속에서 오묘한 아우라를 드러내었으며..
여덟가지 `수행법통`을 계승하였고..
일곱가지 `구전교의`를 수지하였고..
아홉가지 `보장(寶藏)`을 선설(善說)하였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무엇이었을까요?

들여다보지만... 그 속이 어디까지인지 알 수 없는 분입니다..
도둡첸이 남긴 다음 말 속에서.. 
그를 조금이나마 찾아보기로 하겠습니다...


"그가 사는 곳마다..매우 강렬한 향기가 주변을 가득 매웠으니..
그것은 그가 계행이 매우 청정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손 동작 하나마저도.. 영감을 주는 것이어었기에...
사람들은.. 그의 몸짓 하나라도 놓칠까.. 노심초사하였다.. 
그가 사는 곳마다.. 항상 기분좋은 온기를 느낄수 있었으니..
마치 추위 속에서 불을 쬐는 것과 같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붓다로 보거나.. 족첸의 역대 조사로 바라보았다..
계절과 상관없이..그의 곁에서는 항상 기쁨이 가득하고..
어두운것이..활짝 피어나는 느낌이었다..  
가난한 자들이 어마하게 큰무리를 지어 그를 따라 다녔고..  
오만하거나 잔인한자들은.. 용감한자라도..
마치 죄수인것마냥.. 뒤도 안돌아보고 그에게서 달아나거나...
목이 달아나기라도 할 것처럼 머리를 깊이 조아렸다..
그의 앞에서는 아무리 권세가 있는자라도 한없이 작아지고 온순해졌다..
그 앞에서는 아무도 감히 종알대지 못했다...
그는 커다란 확신을 가지고 사자처럼 당당하게 가르쳤다..
매사.. 모든 것이 시의 적절하고..어긋남이 없었다..
그의 마음은.. 산 계곡을 흘러내리는 물처럼 기민하였다..
그의 목소리는  공간을 가득 매우니.. 마치 바다에서 파도가 밀려오는 것 같았다..
법을 들으려는 자도 많고.. 해야 할 법문도 많아..
방문자들이..일주일.. 혹은 한달까지 기다려야 할 때도 있었지만..
그렇게 오래 기다리면서도...사람들은 기쁨에 사로잡혀 있었다.."



20세기에..잠양 켄쩨 왕뽀는 다섯 조각으로 분신하였습니다..
그 다섯은 다시 다섯으로 분신하고있는 중입니다..


`딜고 켄쩨 린포체`... `잠양 켄쩨 최끼 로되` 등이 그의 이름을 이었습니다...
이 분들도 켄쩨의 이름을 영예롭게 하였습니다..
그 이름처럼.. 지혜와 자비의 빛으로.. 이 세상을 비추었습니다..




새로운 세기가 밝았습니다..

`딜고 켄쩨 양시`께서는 다시 쌀을 던지기 시작했고... 
`종사르 켄쩨 린포체`께서는  켄쩨의 또 다른 미학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한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이제...다르마는..경계없는 `소셜미디어` 속에서 움직이고...
`켄쩨(Khyentse)`라는 이름은 소셜미디어 속에서 빛날 것입니다..
`소셜미디어`를 통해.. 쌀을 던지실 것입니다..

Monday, September 5, 2011

The parinirvana of Nyingma head Trulshik Rinpoche (1923-2011)

닝마의 법왕, 뚤식 린포체의 열반


닝마의 법왕이신.. 꺕제 뚤식 린포체 ~ㅇ아왕 최끼 로되(Kyabjé Trulshik Rinpoche Ngawang Chökyi Lodrö)께서 세수, 여든 아홉의 나이로..
네팔 까트만두에 있는 툽뗀 최링 사원에서 9월 2일에 열반에 드셨습니다..
그의 툭담(Thukdam)은 9월 5일까지 지속되었습니다..
(툭담은 죽음의 순간에..정광명을 체험함으로서 나타나는 징후입니다..)
그리고.. 9월 6일인 내일부터는.. 일반대중들이 그에게 꽃을 올릴 수 있습니다..

린포체께서는 1923년에 태어나셨고, 민링 띠첸 린포체의 뒤를 이어..2010년에는 닝마전승의 법왕이 되셨습니다..그는 특별히 딜고 켄체 린포체와 각별한 관계였고.. 14대 달라이라마의 스승이기도 하셨습니다..

그는 부처님시절에는 아난다였고.. 그 후에는 아리야데바.. 산따락시따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뒤좀린포체, 잠양켄체 최끼 로되, 딜고켄체 린포체를 스승으로 모셨고..
특별히 파담빠 쌍게의 시제(고통을 덜어 줌)전승을 계승한 분이기도 하였습니다..

Friday, September 2, 2011

The Wild and True Story of Khyentse Foundation

The Wild and True Story of Khyentse Foundation:
From KF COMMUNIQUÉ, August Issue 2011
As a young boy, having been recognized as the tulku of Jamyang Khyentse Chökyi Lodrö, Dzongsar Khyentse Rinpoche inherited responsibility for Dzongsar monastery and for its associated lineages. Rinpoche’s teachers and tutors invested everything they had to give him what he needed to carry out this enormous task. In the decades since Rinpoche began teaching around the world, thousands of people have been inspired to follow him.
As Rinpoche's activities increased, hisview became even more vast. Whiletending to the individual needs of his students, he constantly seeks new waysto ensure that the authentic teachings of the Buddha will be available a hundred years from now, a thousand years from now. The integrity he exhibits, the skill with which he teaches, and his compassion toward all beings often inspires his students to make generous offerings to him. Rinpoche nearly always offers these resources to support others. Ten years ago, however, the rivers of generosity that ran through him had swelled to the point that it became clear that a new structure was needed to help channel these offerings.
In 2001, Rinpoche made a rare pilgrimage to Dzongsar. He took a handful of his students on the journey, and together they weathered the Jeep rides and long treks to arrive at Rinpoche's traditional seat of Dzongsar, in Derge, Sichuan. One evening he invited his guests into the room that had once been the private chambers of Chökyi Lodrö. The group had been awed by the immensity of Dzongsar and by the enormous responsibility that Rinpoche had been upholding for so many years, personally providing for all the basic needs of hundreds of monks and khenpos. They asked how they could help relieve Rinpoche of the pressure of this responsibility, so that he could focus on his heart's desire. No longer saddled with the financial burden of supporting the monasteries, Rinpoche would be free to turn his gaze outward, even farther.
Khyentse Foundation was established later that year as a system of patronage. Meetings were held in Bali, Hong Kong, and San Francisco to discuss the scope and mission of the Foundation. With the help of Gene Smith, Professor Steven Goodman, Ivy Ang, and a number of those original pilgrims, Rinpoche set priorities for his projects and the group created its first five-year plan. All the goals set in 2001 were met, as were the goals of the second five-year plan.
2011 marks Khyentse Foundation's tenth anniversary. This year Rinpoche raised the bar considerably, encouraging the foundation to set its highest goals yet. "Maybe it's time we miss a few of our goals," he teased. But with the continued support of our friends, and the inclusion of new supporters, perhaps we can see that bet and maybe even up the an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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