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July 16, 2011

두가지 다른 길..



``두 가지 다른 길``
 
서로 다름이 있기에..우리는 경(Sutra)과 속(Tantra)을 분별합니다.
무엇이 다르기에.. 우리는 속승(Tantrayana)을 이야기 합니까?
무엇이 다르기에 우리는 여기에 매료되어 있습니까?
 
이 두 길은 `방법`과 `견해`와 `사람` 등이 다르기에 다르다고 합니다..
무슨 뜻일까요?
 
어느 속전에서.. 이와같이 말합니다..
 
    "목적은 같다.
    무지가 없다.
    방편은 많고,
    수고는 적다.
    지성은 높다.
 
    그러므로, 속승은 수승하다."
 
경승(Sutra`yana)과 속승(Tantra`yana)은 구경의 목적이 같습니다..
그 목적은 붓다의 무상정등정각입니다..
그`러`나
속승은 무지에서 벗어나는 견해가 뛰어납니다.
속승은 도달하는 방편이 뛰어납니다.
수고하지 않는 행위가 뛰어나고..
예리한 지성을 가진 사람이 뛰어납니다..
 
경승인 원인승은. 궁극적 본성, 절대 진리는
여덟 가지 극단에서 벗어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
법계(공성)와 원초지혜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속승은 바로 이러한 무지를 몰아내었기에.. 앞에서 말한 `명공일여`를 깨닫습니다..
그러므로 속승은 궁극적인 본성에 대한 견해가 무지하지 않습니다..
 
원인승은 상대적 진리인 현상과 사물이..
마법적인 환영처럼..상호 의존하여 일어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현상을 붓다의 신체와 붓다의 지혜로 바라보지 못하고...
이슬처럼, 신기루처럼, 물그림자처럼 오염된 것으로 보기에 무지하다 합니다..
속승은 그러한 무지에서 벗어나 있기에 수승하다 합니다..
 
속승의 명상방편은.. 두 가지가 있기에 수승하다 합니다..
생기차제의 방편.. 원만차제의 지혜
 
속승의 행위는 어려움이 적습니다..
원인승은 욕망의 대상을 버리지 않고 깨달음에 도달하는 방편이 없습니다..
그러나 속승은 욕망을 대상으로 취해서..수행의 길로 삼게 되며..
이 한 생에 지금강의 지위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속승은 수승한 덕을 지니고 있는 특별한 사람들을 위한 길입니다..
 
경승은 원인승이라 합니다..
수행자들은 결과로서의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
원인이 되는 길을 밟아가기 때문입니다..
속승은 결과승이라 합니다..
지혜를 깨달아.. 모든 존재를 붓다로 보고.. 모든 세계를 불국토로 보기 때문입니다.
속승은 짧은 시간 안에 결과를 지어냅니다..
중생의 3신(생각, 말, 행위)을.. 수승한 방편의 길로 삼기 때문입니다..
 
속승은 중생의 무지와 감정을.. 붓다의 성품으로 변형시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 것을.. 또 다른 어떤 것으로 만드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변형시킨다는 것은.. 더렵혀진 것을 원래의 상태로 돌려놓는다는 것입니다..
 
롱첸 랍잠께서는 경승과 속승의 차이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보살승(경승)의 경전은..
  중생이 불성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씨앗으로서의 불성을 가지고...
  조건으로서의 공덕과 지혜의 두 자량을 쌓으면...
  불성이 피어나게 될 것이고...
  붓다의 완전한 깨달음이 성취 될 것이다...
  이것을 두고.. 원인승이라 한다...
  원인과 결과가 서로 이어져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속승의 견해에서 보면..
  불성은.. 빛나는 태양처럼 완전한 성품 그대로..
  모든 중생의 삶 속에.. 자연스럽게 나타나있다..
  그것은 정화가 비롯되는 바탕이다..
  바람에 의해 구름이 사라지듯..
  생기차제, 원만차제에 대한 관정과 명상은
  장애가 사라지게 하고.. 성품의 빛이 빛나게 한다.
  그것은 정화를 일으키는 수단(방편)이다..
  있는그대로.. 태양처럼 빛나고 있는 그 바탕에 도달하는 것이
  정화가 이루어내는 결과이다..
  그 순간.. 그것을 가리던 무명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
  그 바탕에 대한 이름과 성품이 바뀌었다 하더라도..
  사실상, 그것은 변화나 과정과 상관없이.. 본래부터 나타나있기 때문이다.."
 
다른 곳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닝마의 견해에 따르면.
  공성의 지견에서는 경승과 속승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
  중관의 공성과 마하요가의 평형..절대 싸만따바드리.. 아띠요가의 원시청정은
  같은 진리를 나타내는 말이기 때문이다.."
 
  "고귀한 나라의 짠드라끼르띠(Candrakirti)와 티벳의 롱솜 최상(Rongzom Chozang)은
  둘 다.. 한 마음, 한 목소리로..
  원시청정은 대공성임을 증명하였다.."
 
  "그러나.. 현상의 측면에서 바라 볼 때..
  마하요가에서..현상은 명징한 속성으로.. 절대청정을 지닌 상대적 진리요..
  아누요가에서..현상은 싸만따바드라요,
  아띠요가에서..현상은 바탕의 현현이자, 자생적 성취의 만달라이다..
  경승에서는 이러한 견해가 알려져있지 않고..그 이름 자체가 없으니..
  경승과 속승 사이에는 아주 큰 차이가 있다.."
 
이와같이.. 경승과 속승의 차이는
절대적 진리인 공성의 견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 진리인 현상의 견해에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