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September 9, 2014

아미따바(無量光佛)..아미따유스(無量壽佛)

아미따바(無量光佛)..아미따유스(無量壽佛)는.. 분간이 잘 안됩니다..
본디부터 같은 것이라면..왜 달리 표현을 했고...
다른 것이라면.. 왜 이리 구별이 안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둘을 이리저리 살피다 보면...
한가지 분명한 것은..
둘은...상호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관련된 여러 경전을 보면...둘 사이에 구별이 거의 없습니다...
그렇지만...동일한 인물인지 확신할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진실이 무엇인지...매우 혼란스러워집니다...
......

아미따바...
무상유가부 속승(續乘)에서 보면..
그는 다섯 종성(種姓)을 대표하는 부처님 중 한 분이십니다...
다섯 종성을 대표하는 부처님은 오선정불(五禪定佛)입니다...
오선정불은 본질이 보신(報身)의 부처님입니다...
다섯분이지만...42적정존에 포함되기도 합니다...
..
각 종성의 부처님은 자신의 각성을 확장해놓은 세계..정토(淨土)가 있습니다..
아미따바 부처님(無量光佛 = 阿彌陀佛)의 정토는 쑤카바띠(西方淨土)입니다...
그는 쑤카바띠를 주재하며...
그 곳에는 그가 다스리는 연화종성(蓮花種性)들이 살고있습니다...
연화종성에는...관세음, 빠드마삼바바님..사꺄무니부처님 같은 분이 계십니다..
..
주재자가 자기각성의 세계를 창조한 자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아미따유스(無量壽佛)는 주재자가 아닙니다..
아미따유스(無量壽佛) 자신이 창조한 공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창조한 세계는 아니지만...
아미따바의 쑤카바띠로 중생들을 이끌어주고..
쑤카바띠에서 주재자에 버금가는 역할을 하시는 분입니다..
..........

경승(經乘)에서는..
이 둘 사이를 구분하지 않았다 할 수 있습니다...
아니...보는 자들이 구분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다르마의 전승역사에서 속승(續乘)이 나타나고...
점차..이 두 존재를 분리해내는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다르마는 역사 속에서 전개되고...
전개됨에 따라...
씨앗안에 함축되어있는 모든것은..줄기와 잎과 꽃으로 구분되어 나타납니다...
역사 속의 다르마의 전개란..그와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역사 속에서 나타나는 개념의 변화 혹은 분화..
그 부분을 부정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

점검의 포인트를 하나 얘기합니다..

``아미따바(無量光佛)는 보신의 부처님이다..
하지만..아미따유스(無量壽佛) 역시 보신의 부처님이다...``
..
아미따바는 우주의 서쪽세계 쑤카바띠(西方淨土)를 주재합니다...
서쪽세계라고 소개하였지만..
그 세계는 아미따바의 자각의 내용일뿐입니다..
누군가가 그세계로 안내가 된다면...
그는 아미따바의 깨달음이 만들어 놓은 자장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는 그의 깨달음과 쉽게 공명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가 그의 각성을 확장하여 쑤카바띠라는 거대한 세계를 낳았으니...
그가 진정 그 세계의 주인입니다...
쑤카바티는 아미따바 자신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겁니다...
이것을 알고 접근하는 것이 중요하리라 봅니다..
..
아미따유스(無量壽佛) 역시 쑤카바띠(西方淨土)를 주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움직이는 방향은 다소 다르나..
그 역시 쑤카바띠에 깊히 관여하며..쑤카바띠로 중생들을 안내합니다...
아미따유스(無量壽佛)는 무병장수라는 이미지로 포장이 되어있지만...
그 안에 숨겨져있는 힘의 효과로...결국 쑤카바띠로 안내가 됩니다..
그러나 아미따유스(無量壽佛)는 쑤카바띠(西方淨土)를 낳은 창조자는 아닙니다...
아미따유스(無量壽佛)는 자기 고유의 정토가 없습니다...
그는 매우 큰 다양성을 가지고...
필요에 따라...
서방정토 뿐 아니라 ..다른 여러 정토에 머무르고..관여합니다...
독특한 캐릭터입니다...
..
사꺄무니 부처님은 서방정토..쑤카바티의 장엄상을 안내하면서...
아미따바(無量光佛)를 말했다가 아미따유스(無量壽佛)를 말했다가 합니다...
한 정토의 주재자를 얘기하면서...두 이름을 혼용하고 있습니다...
이 경의 내용을 듣는 사람들은 쉽게 생각하죠..
``정토의 주인은 본디 하나다...
정토란 그의 각성의 영역이기 때문이다...``이렇게 생각하면서...
``그러므로 둘은 다른 표현의 동일 인물이다..`` 이렇게 결론내려버립니다...
불교사전에도 둘은 같은 존재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서방정토의 주재자를 얘기하는 자리에서
아미따바(無量光佛)만큼이나 아미따유스(無量壽佛)라는 이름이 나타나는 것은...
서방정토를 주재한다할 만큼이나 깊히 관여하기 때문이지...
완전히 같은 존재이기 때문은 아니라는 겁니다...
수학적인 논리로 볼 때...
99%는 같지만 1%가 다르다면 다른 거 아닌가요..?
하지만 본질에서는 하나로 겹칩니다..

둘의 차이는 영화 `아이로봇`에 나오는..
NS-5와 써니의 차이같은 거 아닐까요..
..
써니는 `NS-5`이지만...
자신의 유니크함 때문에 `써니`이기도 합니다...
거기 나오는주인공들은..그를 두고 고민을 하지만..
그의 정체성은 그저 `NS-5`이어야 할까요..?
그런것처럼...아미따유스(無量壽佛) 역시 유니크함으로 분별이 되는 것 같습니다..
......


점검의 두번째 포인트입니다...

``같은 자가 아니라는데... 어떻게 겹친다는 건가..?``

아미따유스(無量壽佛)는 아미따바(無量光佛)의 분신입니다...
아주 대표적인 분신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해놓으면...혼란스럽죠...
아미따바(無量光佛)처럼..
아미따유스(無量壽佛) 역시 보신의 부처님이기 때문입니다..

``둘 다 보신의 부처님이라면서 분신이라니..?
보신의 부처님이 나툰다면 화신이 되는 거 아닌가..?``

둘 다 보신의 부처님인데...
한분이 다른 분의 분신이고...
그것도.. 보신으로서의 분신이라고 합니다..
티벳에서 일반적으로...
아미따유스(無量壽佛)가 아미따바(無量光佛)의 보신이라는 점에서 이의가 없는 것 같습니다..
보신 부처님이 수많은 화신부처님의 뿌리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야기입니다만..
보신의 부처님이 보신의 영역에서 다른 보신의 분신을 나툰다는 것은..생소하게 여겨질겁니다...
그러나 이것은 되는 이야기입니다..
보신의 부처님의 분신이 보신의 부처님일 수 있고..
화신의 부처님의 분신이 화신의 부처님일 수 있습니다...
아미따바는 보신과 화신이라는 다차원에서 많은 분신을 나투었으며...
아미따유스(無量壽佛) 역시...
화신으로서의 분신이 아니라..보신으로서 분신이 여덟명이나 존재합니다...
바즈라 아미따유스(金剛 無量壽佛)..
라뜨나 아미따유스(寶 無量壽佛)..
빼드마 아미따유스(蓮花 無量壽佛)..
까르마 아미따유스(業 無量壽佛)...
아왈로까 아미따유스(觀 無量壽佛)..
구나 아미따유스(性品 無量壽佛)..
갸나 아미따유스(知 無量壽佛)..
아짤라 아미따유스(不動 無量壽佛)...
..
이 분신 중에서  한 분은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꺄무니 부처님께서 설하신 관무량수불에 관한 경전이 있기 때문이죠...
빠드마삼바바님 역시 그 본질이 아미따바(無量光佛)라고 했습니다...
다만 보신의 분신인 것은 아니고... 화신으로서의 분신이지만요...

아래 사진은 아미따유스의 여덟 분신을 함께 보여주는 아미따유스 만달라입니다...
만달라에서...
중앙에 있는 것이..오늘 쟁점의 대상이 된 아미따유스이고...
그를 둘러 싼 여덟 연꽃잎에..여덟명의 분신이 배치되어있습니다...
............

또 다른 점검 포인트가 있습니다...

``다른데서는..
아미따유스(無量壽佛)는 보신이고..
아미따바(無量光佛)는 화신이라던데.. 그것은 또 무슨 얘기야..?``

보신의 부처님이라면...
보신이라면...
완전한 보신의 13가지 장신구로 장엄을 하고있어야 합니다...
서른두가지 상과 여든가지 종호가 갖추어져 있어야 하구요...
..
아미따유스(無量壽佛)는..이 모든 것을 보여주지만.
아미따바(無量光佛)는 보신의 장신구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대신..가사(袈裟)를 걸쳤으며...발우(鉢盂)를 들고 있습니다...
틀림없는 화신 부처님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아미따유스(無量壽佛)의 탕카를 보면...
그의 머리 위에..
화신불처럼 생긴 아미따바(無量光佛)가 무지개빛에 감싸여있습니다...
아미따유스(無量壽佛)의 뿌리가 아미따바(無量光佛)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를들어...
관세음보살의 머리 위에는 항상 아미타불이 그려져있습니다...
그것 역시.. 관세음의 뿌리가 아미따바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만 관세음이 보살로서 나타나니...
가사를 걸치고 발우를 들고있는 아미타바의 그림이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아미따유스의 탕카에 나타난 아미따바가 문제인것처럼 보이는 것은...
보신의 부처님인 아미타유스의 뿌리가 아미따바임을 보여주는데도...
아미따바의 모습이 화신의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탕카에 나타난 특징으로 보면...아미따바는 화신이지만...
관계로 보면... 보신의 부처인 아미따유스의 뿌리로 되어있으니...화신일수가 없습니다...
보신의 뿌리는 보신일 수 있으나..보신의 뿌리가 화신일수는 없습니다...
오해를 일으키는 이런 표현이 나타나는 것은...
그 표현이 전통적으로 대승의 테두리 안에 갇혀있기 때문입니다...
왜 갇혀있을까요..?
대승의 테두리 안에서는 본초불이나 보신의 부처님 따위는 존재하지 않고..
화신 부처님이 최상의 자리에 있습니다...
그리고 대승에서  화신부처님처럼 표현한 아미따바(無量光佛)의 모습이...
아시아 구석구석까지 대중적으로 정착되어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속승의 탕카에서도 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있지않나 생각됩니다...
대승의 테두리 안에서..
아미따바(無量光佛)는..로께시와라 부처님 시절에 보리심을 일으켜서 화신부처가 된 승려..
`다ㄹ마까라`이어야 했을 겁니다...
하지만...
보신의 오선정불과 한짝이 되는 여성불이 안겨있는 탕카에서는...
표현이 제대로 되어있습니다..
아미따바(無量光佛)나...악쏘브야(阿閦佛) 등이 ...
13가지 장신구를 하고있는 보신의 모습으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다음 사진은.. 
아미따바(無量光佛)가 여성불인 그의 명비..빤다라바시니를 안고있는 모습입니다..
................

아미따바와 아미따유스를 수행하면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아미따바(무량광불)를 수행하면 무한자비의 빛이 키워질겁니다..
아촉불을 수행하면 변지(邊知)가 키워지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아미따바의 서방정토..쑤카바띠로 갈겁니다...
잘 수행하면요..
아촉불을 수행한자는 아촉불의 동방정토..아비ㄹ아띠로 가겠지요...
...
그렇다면 아미따유스는...?
아미따유스는..병약함을 극복하고 오래 살게 할겁니다...
극단적으로는 불사의 몸을 이룰수도 있다고 합니다만...
아미따유스를 잘 수행하고...오래살다가 죽는다면...역시 쑤카바띠로갑니다..
무병장수의 수행이라 하지만...결국 정토수행이기도 한셈이지요...

두 존재의 진언의 차이를 물으셨지만...
목적이 중요한 것이라면...둘은 차이가 없습니다..
아무튼..서방정토로 날라주니까요...
하지만.. 삶에서 나타나는 양상이 중요한 것이라면..둘은 차이가 있고...
그 차이를 가릴 필요가 있을 겁니다...
그 차이는
자비의 빛으로 포장하여 서방정토로 가거나..
무병장수라는 껍데기로 포장하여 서방정토로 가는 차이쯤일까요..?

나는 서방정토로 가리라 ..이렇게 결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생의 번뇌가 다르니...
극복하는 방향도 다르고..
가는 정토도 그에따라 달라질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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