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February 24, 2014

내 안에 있는 네번째 우주


네 번째 우주는  비드야다라(持明)가 바라보는 우주이다..
이것은 부처님의 세 가지 법륜(法輪)을 포괄하는 우주이자..
세 가지 법륜 어디에도 속해있지 않는 족첸의 우주이다.

이 네 번째 우주의 입장에서 보면...
사물의 근본바탕이 다음 여섯가지 특성을 지지고 있다는 말은 거짓이다.

첫 째, 사물의 근본바탕이 본래부터 존재한다는 말은 거짓이다...
추함이나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나타난 사물의 바탕 속에 본래부터 존재하는 것이라면..
나타난 사물의 현상이 본래 청정하다는 말은 거짓되기 때문이다.

둘 째, 사물의 근본바탕이 결정되어 있는게 아니라는 말은 거짓이다.
사물의 근본바탕 결정되어 있지 않은 어떤 것이라면..
어떤 경로를 거치더라도..
속박에서 벗어난 뒤에도..무(無明)의 장애를 다시 경험할 수 있다는.. 
비논리적인 결론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셋 째,사물의 근본바탕이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말은 거짓이다.
결정되어 있는 것이라면, 사물의 본성은 변할 수 있다는 것이고..
무명의 장애는 끝까지 제거할 수 없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넷 째,사물의 근본바탕이 다른 것으로 변할 수 있다는 말은 거짓이다.
변할 수 있다면.. 그 바탕은 영원한 것이 아니고..
해탈의 결과는 다시 윤회의 원인으로 바뀔 수 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다섯 째,사물의 근본바탕이 어떤 무엇으로 정의내려질 수 있다는 말은 거짓이다.
나타난 현상이 수없이 많은 것이라면.. 바탕 또한 수없이 많아질 것이고,
사물의 바탕을.. 수없이 한정된 어떤 것으로 보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여섯 째, 사물의 근본바탕이 수없이 많다는 말은 거짓이다.
수없이 많은 바탕은 위없는 깨달음의 바탕이 될 수 없다.
무수히 대비되는 바탕은.. 청정한 바탕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일체 사물의 근본 바탕이 본래 청정하다고 보는 것은
이러한 잘못된 사고에서 벗어나있는 족첸의 수행자의 눈높이이다.
사물의 근본 바탕은.. 말이나 개념.. 설정 따위를 넘어서 있고.. 
존재한다..혹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한계를 완전히 넘어서 있다..
그게 사실이라면.. 중생이 상사라(輪廻)에 속박되어 있다는 말은 틀린 게 아닌가?
사물의 근본 바탕은 어디에도 예속되어 있지 않고, 어떤 장애를 가지고 있지도 않으니,
묶여있다거나 벗어나 있다는 말로 규정할 수 없다.
그러나 모습을 지닌 모든 것(衆生)은 윤회의 사슬에 묶여 있다.
묶여 있거나  벗어나 있는 것이 꿈 속에 보이는 것처럼..
묶여 있거나 벗어난다는 것은.. 사물의 근본 바탕이 지어내는 물 그림자 같을 뿐이다.
그 것을 경험하지만..사물이 가진 모습은 있는 것이 아니고, 있었던 적도 없다.
사물이.. 본래 근본바탕으로서 존재하는것이라면.. 목표인 깨달음은 내재하는 것이다...
어떤 무엇이 되려는 노력과 상관없이... 애초부터 해탈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사물은.. 본래부터 근본 바탕이어서...
깨달음이나 지혜라는 것은.. 애초부터  그 바탕 속에 갖추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사물의 근본 바탕을 들여다 본다면...
마치 꿈이라는 착각에서 깨어나는 것처럼..한 순간에 그릇된 믿음에서 벗어난다.
그러나..이 사물의 근본바탕을 어떤 모양으로 규정할 때에는.. 
속박되어 있거나.. 해탈되어 있다는 두가지 측면이 나타난다.


사물의 근본 바탕(Rigpa)은.. 부처의 바탕이자 중생의 바탕이다..
`릭빠`는 비롯됨이 없는 청정한 공성에서 벗어나 있지 않고,
그 본질(本質)은 원시의 청정한 바탕이며..
그 성품(性稟)은  명징하게 알차리는 자각이다.
그 본질은 존재한다.. 존재하지 않는다는 어떤 한계에 묶이지 않으며,
그 성품(性稟)은 나타나 어떤 모양을 지을 잠재성이다..
그리고 이 둘의 무분별이 대원만(족첸)이며.. 네 가지 극단에서 벗어나 있다..
둘이 아니라 셋으로 본다면, 본질(本質), 성품(性稟), 기운(運)이 된다.

깨달음이란 사물의 청정한 바탕(릭빠)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 것은 과정에서 세 가지 깨달음으로 나타난다.
그 성품(性稟)은 명징한 자각으로 비추고.. 다섯 가지 빛을 드러낸다.
그 중에서 세 가지 눈부신 빛은...모든 것을 포용하는 정광명(淨光明)이다.
그러나 그 것은 분리된 사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 기운(運)은 원시의 청정한 공성을 보는 명징한 자각으로 나타난다.
그 자각의 성품은 어떤 것에도 걸림이 없이 명징하게 비추고..한계가 없다.
이 원시의 청정한 바탕은 내재되어 있지만.. 겉으로 나타나거나 파악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 본질(本質)과 성품(性稟)은 구경의 깨달음의 순간에 드러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바깥으로 드러난다는 것이 아니다... 자기내포되어있기 때문이다.
이 원시의 청정한 바탕없이는 성취도 없고.. 깨달음도 없다.
붓다의 두가지 자량도 쌓이지 않을 것이다...

릭빠의 자각이 모든 사물의 청정한 바탕에 머무를 때는
그 자각이 시작되고 끝나는 지점에서.. 
자각이나 빛의 모습으로 나타나 있지 않은.. 내적 명징성으로만 존재한다.
그러나 릭빠의 자각이 원시의 청정한 바탕에서 벗어날 때는.. 
그것은 눈부시게 빛나는 정광명(淨光明)으로 나타난다.
어떤 한 중심에 머무는 릭빠의 자각은.. 일시적인 바탕에 머무는 릭빠의 자각이다.
이 경우.. 릭빠의 자각은 다르마다투(法系)에서 벗어나고...
삶의 모습을 띠고 있기에.. 나타난 그 모습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 것은 청정한 바탕이 아니라..그 바탕의 나타남으로 보아야 한다..


청정한 법계(法系)의 근본 바탕은 생기 넘치는 화병(花甁)의 신체이다..
어떤 것도 일어나지 않는 청정한 바탕에서 벗어날 때.. 명징한 자각의 기운이 움직인다.
명징한 자각의 기운이 움직일 때.. 사물의 바탕에서 릭빠의 자각이 일어나게 된다.
이 릭빠(Rigpa)의 자각은..
근본의 자각(涅槃)과 사물의 모습(輪廻)이 동시 현존하는 세계의 여덟 문으로 나타난다.
그 순간 청정 법계(法系)가 비어있는 하늘처럼 높은 곳에 나타난다...
그 공간 전체에 편재해있는 정광명(淨光明)의 지복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릭빠의 자각에서 일어나는 근본바탕의 거대한 모습이 아래쪽으로 나타나고..
그 주위에.. 일체를 한 모습으로 인식하는 세계가 모든 방위에 나타난다..
그 보다 더 아래쪽으로는.. 
여섯 가지 모습으로 자신을 인지하는 세계(六道輪廻)가.. 윤회의 문을 통해 나타난다...

포괄적이고 자기내포적인 근본바탕(릭빠)이..바깥으로 나타날 때..
본질(本質)에 있어서는 청정한 공성의 빛이지만..
성품(性稟)은 다섯 가지 명징한 자각의 확장이며..
기운(運)은 열린 하늘처럼 걸림이 없고..모든 곳에 동시에 미쳐있다..
이 기운(運)은 세가지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인지하는 지능...
안아서 기르는 자비..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널리 이롭게 하는 능력..

기운(運)은.. 명징한 자각이 외부세계로 드러나는 여덟개의 문이다...
자비(툭제)
광명(외)
신체(꾸)
지혜(예세)
불이(니메)
해탈(따돌)
회문(마닥빠코ㄹ외고)
혜문(닥빠예세끼고)

이 여덟 가지는 고귀한 소원성취의 보석이다...
근본바탕을 외부로 현현시키는 이 힘은...어떤 무엇이라도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자비로운 기운은.. 우주에 있는 모든 사물에 스며들어있다..
열반과 윤회는 무엇이 디었든.. 이 자비로운 기운이 나타남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우주를 다 뒤진다 해도..이 자비로운 기운에 기반하지 않고 나타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사물의 현상을 가늠하는 관념이 되었든..관념을 벗어난 각성이 되었든...
모두가 릭빠의 청정한 자각이 드러남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열반과 상사라에 있는 일체 사물의 모습은...
릭빠의 창조적인 힘이 마음을 통해 나타나는 현상일 뿐이다..
이 창조적인 힘은...마릭빠(無明)의 속박과 릭빠(常明)의 해탈을 드러내더라도.. 
드러나는 그 두가지 모습으로부터 본래 자유롭다..


사물의 근본바탕(릭빠)을 자각하는 것은  해탈의 토대이다.
이 근본 바탕이 자각될 때 나타난 모든 사물의 모습은 해탈의 도구로 변한다..
근본 바탕이 자각되지 않을 때 나타난 모든 사물의 모습은 속박의 도구로 변한다.
근본 바탕이 드러나는 순간.. 그 것을 자각하는 사람은..
그 것을 다른 어떤 사물이 아닌,자기 본성의 내적 광명으로 인식하게 된다.
그 순간.. 사물을 어떤 무엇으로 바라보려는 모든 노력이 사라지고..
자기내포되어있는 그 자각이 이루어지는 순간.. 깨달음은 비추어 오게 된다.
그 깨달음은 마릭빠의 속박과 릭빠의 해탈.. 이 둘의 차이를 명확하게 알아차린다..
무명의 어두운 구름이 사라지고.. 원시의 청정한 바탕이 드러난다.
이 순간.. 근본 바탕은 그 자체를 전개하여...
분별없이 열반과 상사라가 동시현존하는  장엄한 드라마를 보여준다...
이 것을 두고..모든 사물 속에 감추어져 있는 청정한 바탕을 깨닫는다고  한다.
나라고 하는 사물의 모습이.. 원시의 청정한 바탕 속으로 녹아들어 갈 때..
궁극적인 깨달음이라는 열매가.. 
어떤 무엇으로 현현하기 이전인 그 자체의 청정한 바탕 속에서 저절로 일어난다.

롱첸빠(Longchenpa)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우주(宇宙)의 근본 원인은.. 일체의 자기내포적인 각성의 상태.. 릭빠이다.
이 릭빠는 나타난 사물의 바탕이며..
사물이란 릭빠에서 벗어나있는 것을 말한다.
이와같이 일체를 포괄하지만 자기내포적인 청정한 자각을..그 상태로 지키지 못했을 때...
명징한 자각이 일어나고..
그 자각이 전개됨에 따라.. 이 우주가 하나의 사물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사물의 근본 바탕이 청정한 공성이고.. 
나타난 사물 하나하나((衆生)가 있는그대로를 명징하게 비추고 있다면..
어떤 장애에도 걸림이 없어야 하고.. 어떤 한계로도 규정지을 수 없어야 한다.
모든 사물은.. 본래 붓다가 지니고 있는 본질과 성품과 기운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청정하게 비어있는 바탕에서.. 모든 사물을 있는그대로 명징하게 자각한다면..
모든 것은 이미 결함이 없고 완전하기 때문이다.
사물의 근본바탕은 속박되어있거나 해탈되어있지 않으나..
속박되거나 해탈되는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
그러므로..사물의 본래 깨달아 있는 바탕은..다시 깨달아가는 과정을 통해 드러나야 한다.
깨달음은 이렇게 이루어진다.

생각을.. 하나의 대상으로 삼아 관찰해 보면..
이 것은 비어있고 모든 사물을 동시에 비추는 릭빠(常明)의 자각에 지나지 않는다.
그 순간.. 하나의 생각을 구체적인 어떤 무엇으로 규정하지 않게 되고..
릭빠의 명징한 자각이.. 밖으로 모습을 갖추어 드러내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이렇게 포괄적이고 자기내포적인 자각이 일어날 때,
일어난 생각을 변형시키거나 없애려는 어떤 명상적인 기법을 사용하지 않아도..
생각이라는 거짓된 설정은.. 본래 없었던 것처럼.. 즉시 사라지게 된다.
그 순간 릭빠의 자각이 일어나고.. 붓다의 지혜가 드러난다.

이 길에서 중생이라는 조건과 보살이 나아가는 길과 부처가 도달하는 열매는.. 
서로 다른것이 아니라...포괄적인 하나로서 동시에 나타난다...
그러므로 다르마가 추구하는 사물의 청정한 바탕은...살아가는 다양한 모습 속에 들어있다.
그러므로 깨어서 바라보는 일상의 모든 행위는...부처를 깨닫는 방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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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가 다양하게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하나의 일시적인 사물로서 존재하는 우리 인간이..
저마다 다른방식으로 자기 삶을 바라보고.. 행동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은.. 자신이 선택한 다르마인 것이고..수행방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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