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March 24, 2014

힌두철학과 불교철학의 역사적인 조우..

부처님의 법이 뿌리를 내릴 때에…
불교와는 다른 논리를 주장하는 여섯 사람이 있었다…
6사외도란..소위 이런 여섯명의 스승이 말하는 어떤 다른 가르침을 말한다..
그때 당시에는... 이 여섯가지 논리가 불교의 논지를 방해하는 장애물이었다..
논리적인 설득력으로...다르마로부터 사람들을 멀어지게 하는 것들이었다..
지금은 입장이 다르니...그와같은 장애가 몇가지인지 새로 규명해야 할 것이다…
그때로 되돌아가 여섯가지 주장을 살펴보기로 한다…
그리고 그 주장을 오늘의 우리에게 비추어 고민해보자…
그럴싸하지않으면.. 경계하지도 않는다…
문제는.. 그 논리가 우리들에게도 그럴싸하게 들린다는 것이다...



첫번째 외도는 `뿌라나`라는 사람의 주장이었다…
모든 것은 우연의 산물이다…
원인없이 우연의 조합으로 나타나는 것이니…죽으면 그만이다..
나아가야 할 지향점도 없고...착해야 할 이유도 악하지 말아야 할 이유도 없다…
선과 악에 집착하지마라...그냥 흘러가는대로 살면 된다…
추구함으로서 도착할 곳은 없다..정토도 없다..
선악이란..그렇게 생각하는 인간의 관념속에만 있는 것 뿐이다…


두번째 외도는 `마깔리`라는 사람의 주장이었다…
그는 운명론자였다...
모든 것은 도달하게 될 결론이 있고...그 끝지점을 향해 운명적으로 나아간다…
그것은 프로그램과 같아서...그냥 그렇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
우리가 개입해서 노력을 한다거나.. 의지를 발휘한다고 해서 결과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노력한다고 해서..깨끗해진다거나 더러워지는 것이 아니다…
아무것도 보탤 수 있는 것이 없다...
모든 것을 순리에 맡기고 있으면… 저절로 거기에 도달한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렇게 보채면서 사는가... 내버려둬라…


세번째 외도는 `싼자야`라는 사람의 주장이었다…
그는 불가지론자였다…
사물의 본질을 있는그대로 인식하거나 서술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니..옳다 그르다는 분별을 떠나라…
………………...
그러나 그들은 선택을 허락받지 못했으나..
사유하는 인간은 어떤 지점에 머무르지 않을 수 없는 맹점이 있다…
그래서..이것도 저것도 아닌 중간지점에서 그들이 머무를 공간을 찾았다…
애매모호한 회색지대에 자신을 숨겼던 것이다…


네번째 외도는 `아지따`라는 사람의 주장이었다…
그는 유물론적 쾌락주의자였다…
도덕같은 것은 필요없고… 내 마음이 느끼는 것을 그대로 따라가면 된다…
거스르지말아라...하고자 하는 그대로 살아라…
도덕적으로 꾸밈으로서 미래를 약속하고자 하거나..
사회질서에 따라감으로서 인간이 성숙이 된다는 논리는 어리석다...


다섯번째 외도는 `빠꾸다`라는 사람의 주장이었다…
생명의 본질은 그대로 불멸하다…
사라지게 할수 있는 것도 아니고...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선을 행한다하여 아름답게 할수도 없고...악을 행함로서 더러워지는 것도 아니다..
배움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궁극적인 실재가 있어..그대로가 영원히 불멸하다는 얘기다..


여섯번째 외도는 `니간타`라는 사람의 주장이었다…
그는 이원론자였다…
지금의 자이나교가 이것을 대변하고있으므로… 자이나교를 보면 이것을 안다…
……………………
불교가 경계하고 부정했던 것은 6사외도이지.. 6파철학은 아니었다..
하지만...6파철학의 논사들이 불교의 논사들에게 덤벼왔으므로 승부를 본 일이 몇번있다…
대부분..6파철학의 논사들은… 떡실신되가지고.. 불교논사로 전향하곤 하였다…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을 쓴 아시바고샤(馬鳴) 역시 그러하였다...
아리야데바에게 한방 맞고.. 몹시 신음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뭐 어쨌다는 말인가..?
………………...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가..?
불교는 힌두의 토양에서 나왔으니…
그 품안에 있는 자식과 같고.. 항상 그 어머니에게 빚진다는 논리인가..?
그렇다면 답은 쉽다...쉽게 둘을 중재할 수 있다...


아니면…
그와 상관없이 다르마에 대한 견해와 명상이 힌두의 것이 더 수승하다는 것인가?
나는 힌두철학의 어떤 맹점을 보았으므로…나는 내자리에 동요없이 머무른다…
맹점이라하더라도… 그것은 상대적인 것이어서…힌두교 자체를 부정할 수 없다..
나는 힌두가 불교를 폄하한다하더라도 열받지 않는다…
내가 동요해야할 이유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토양을 제공한다는 말에는 오류가 있다…
토양은 따로있다…
아주아주아주 더 멀리 거슬러 올라간다…
힌두교이든.. 불교이든 ..그 토양의 자식이다…
형과 동생이...서로 싸운다…
형은...자신의 처지도 모르면서...동생보고 내가 너의 토양이다 그런다…
어이쿠~~
동생은 그런다…
너는 어미로부터 먼저 나왔으나...미성숙한 문열이다…
대개 장남이 그러잖은가…키도 작고 팔뚝도 가늘고!!...
내가 옛날의 동생이 아녀~~팔뚝좀 내밀어봐 형~~``
………………………
미래에 다른 다르마가 나타나면 그럴 것이다…
너는 나의 토양에서 나왔으므로 불교의 아류이다…
새로운 다르마는 말할 것이다…
``나는 네가 태어난 어미로부터 새로 태어난 자식이다..
너의 목숨이 다하였기 때문이다…``


시공은… 다르마가 나타나는 공간이지만…
다르마는 필연적으로 시간의 녹이슬고 쇠퇴하기 마련이다…
시원의 바탕에서 끊임없이 주기적으로 다시 나타난다 …
부처도 주기적으로 다시 오고.. 다르마도 새로 나타난다...
시간이 지나면 다르마는 쇠퇴하고… 본질을 잃어버린다…
힌두의 베다라는 토대와 불교는 이렇게 운명의 교차지점에서 만났다…


시야를 조금더 좁혀본다…
불교는 인도에서 티벳으로 건너갔으니..
티벳불교는 인도불교의 아류인가..?
증명해보라….


까귀전승은.. 두가지 전승의 토대를 가지고 있는듯이 보인다…
하나는 인도의 마하싯다의 토양에 뿌리박고 있는 어떤 것이고..
하나는  문화와 토양과는 아무상관이 없이...지금강의 배에서 태어난다…
이럴때는 지금강도 자식을 낳는다...
닝마전승의 마하요가 아누요가 아띠요가(족첸)는…금강살타..금강수로부터 새로 태어난다…
그러나 대승의 철학이라는 인도불교의 산물도 품안에 껴안고 있다…
다른 전승도 사정은 거의 비슷하다...
둘은...같은 부모로부터.. 새로 태어난 다른 형제와 같은 것이다…
부모는 지상에 있는 것이 아니고...저 하늘에 있다...
지상에 있는 것끼리 토양을 운운하면 되겠는가…!!
…………………...



서로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몇가지를 열거해본다…
일치하지 않는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불교의 세가지 가르침을 모두 보지 않는데서 생기는 경우가 많다…


*힌두 6파철학은 베다에 의지한다…그것을 버리면 토대가 사라진다…
불교는 베다에 일체 머무르지 않는다..


*불교는 개체적 자아(영혼).. 최초의 원인.. 아트만을 인정하지 않는다..
힌두교는 그 하나의 원인에서 모든 것이 비롯되었다고 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심상속은 이것과 비교가 되는 부분이지만…
인과로서 나타나는 일시적인 현상의 산물로 취급한다…
아트만이라는 개체적 자아는... 불교의 입장에서는 네가지 극단 중 하나일 뿐이다


*힌두교는 부처를 비시누의 화신으로 본다…
불교는 다르마의 뿌리를 석가모니부처님으로 보지 않는다…
그는 비시누 이전부터 이어져 온 수많은 부처님 중 한 부처님일 뿐이다…


*힌두교는 4성계급에 종속을 받는다…
불교는 거기에 종속되지 않는다…
브라만이란… 불교에서 말하는 다르마를 수행할수 있는 수승한 인간의 의미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까르마의 내적인 부분이지… 외적인 혈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힌두교의 불교의 본존들은 겹친다.. 그러나 그 의미 적용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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